그저 '나 자신'이 되어도 좋을 세상을 위해
[왜냐면] 허휴정ㅣ가톨릭의대 인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끝이에요.”
진료실에 들어온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는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적응하지 못하더니, 자퇴를 했다. 이후엔 몇년째 집, 정확히는 자기 방 밖을 나오지 않고 지냈다. 그는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보다 못한 부모가 그를 끌고 나와 병원을 찾았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약과 상담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한달에 두세번, 진료가 있는 날은 세상 밖으로 나와 마음속에 묻어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그는 ‘우울증 환자’이기 이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커피 향기와 달콤한 과자 맛을 섬세하게 구분할 줄 아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로큰롤을 좋아했고, 언젠가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늘 성적이 좋지 못했고,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런 그를 부모는 무척 부끄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역시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어려웠고, 부모가 바랐던 취직이 잘되는 전공을 마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고, 무기력해졌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부모에게, 세상에 화가 났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에 복수하고 싶어졌다. 내가 그에게 처음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세상은 그를 그동안 “열등생”, “백수”, “이생망”, “왕따”, “무능력자”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내가 만나왔던 수많은 청년 우울증 환자들의 이야기를 스크랩해 만들어낸 그의 이야기는 허구이자, 허구가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우울감 이전에 극심한 무기력감을 겪었고, 무기력감의 이면에는 그들을 “백수”, “무능력자”로 이름 붙이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그러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유일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생산성으로 존재의 가치를 매기곤 한다. 그리고 세상이 규정하는 생산성은 대개 돈으로 규정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자는 곧,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 혹은 “무능력자”, “기능하지 못하는 자”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경우에는 항우울제와 상담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들을 멸시했다.
세상이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나날에, 사실 그는 식사도 했고, 산책도 했고,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가끔은 가족들에게 따뜻한 말 한 조각도 건넨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증발되어 버린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기에 그는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생산하기 위해, 기능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그저 태어났기에 그냥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를 진료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어떻게든 그를 그 자체로의 고유한 존재,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지는 가치, 그만의 꿈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름과 이야기는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가자 곧 소멸되었다. 때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세상의 말들은 기만적으로 들린다.
시험 성적으로 서열화되는, 혹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생산성에 따라 숫자로 사람 그 자체를 정의하는 세상 속에서 그가 그로서 산다는 것은 허망한 꿈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개인은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존중과 행복이란 세상이 정의한 “능력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러한 식의 ‘능력주의’에 반대한다. 아니, 세상의 상층에 있는 사람들도 혹여 언제고 도태될 수 있으니, 늘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그인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의 주치의로서 세상에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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