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42>] 나이 드는 게 재앙이라니, 그럼 죽음은 재앙의 해소인가
마르크 오제라는 인류학자가 쓴 에세이 ‘나이 없는 시간’을 읽었다. 뭔가에 끌리듯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나이 없는 시간이라잖아. 궁금하지도 않나. 나이부터 물어보고 나이만을 알고 싶어 하며 나이 드는 걸 슬퍼하고 청춘을 찬양하는 인간들에게 어느 노학자가 쓴 ‘나이 없는 시간’에 대한 사색과 통찰이 필요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영원히 살기 위한 불로초 같은 상상력 말고도 나이라는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지금 예정된 것과 다르게 쓰일 것이다.
나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순 없겠다. ‘나이 없는 시간’이라는 제목을 달리 말하면 ‘노년 없는 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나이란 결국 ‘노년’에 다름 아니니까. ‘나이 없는 시간’도 종국에는 노년에 대한 획일화한 공포와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정말 노년,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후’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한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 이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도 충분히 적절하다. ‘한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노후라는 유령’. 유령의 자리에 ‘노후’를 넣는다고 해서 누가 과장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달간 어른들이 쓴 서평을 읽고 코멘트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바쁜 와중에 이런 일을 수락하는 것도 노후에 대한 내 불안의 발로일지 모른다. ○○카드, ○○증권으로 불리는 대기업에서 직원들의 문화생활을 지원하는 취지로 마련한 북클럽의 일종이었는데, 직원들이 정해진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서평을 써서 보내오면 그중 가장 잘 쓴 글을 몇 편 꼽고 모든 글에 짧은 심사평을 남기는 일이었다. 책의 목록은 대체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설도 있고 철학책도 있고 경제·경영서도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읽은 것도 있고 읽지 않은 것도 있으며 읽지 않은 것 중에는 읽기 싫은 것도 있었다. 지난주 선정 도서는 이지성의 ‘부의 미래’였다. 읽기 싫은 책이다. 일목요연하게 현재와 미래를 정리할 게 뻔하지만, 그 일목요연함이, 정리와 정돈이, 나를 겁줄 것 같아서였다. 나는 겁에서 놓여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일부러 겁먹기 위해 책을 들지는 않는다. ‘나이 없는 시간’을 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경제 전문 잡지에서 어쩌다 마이너리티 감수성을 가득 품고 있는 문학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내가 아닌가. 현실 생활에서라고 다를 것도 없다. 나는 ETF(상장지수펀드)도 안/못 하고 코인도 안/못 한다. 해야 할 것 같지만 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틈틈이 읽고 쓰는 일이 내 미래 가치를 올리고 있을 거라고 (실은 더 오래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증권 직원들이 쓴 90여 편을 읽으며 느낀 건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투자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도 ‘노후’는 똑같이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책에 대한 서평 중 거의 모든 글이 ‘노후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노년은 대비해야 할 재난이었다. 나이 드는 게 재앙이라니. 그럼 죽음은 재앙의 해소인가. 노년을 끝내기 위해 죽음이 와야 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노년이라는 지옥이 펼쳐지는 건데. 생각하면 끝도 없이 막막하다. 죽음만이 답이니까.
지금 인류는 오래 사는 병에 걸렸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100세 시대라는 공포가 우리의 현재를 이토록 저당잡는다. ‘나이 없는 시간’에서 오제는 나이에 따라 육체가 퇴락해 가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부정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시간은 불려 나오는 것이지 순차적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다. 죽기 전까지 인간이 붙들고 있는 것이 최근의 기억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하고, 치매에 걸린 사람이 주로 어린 시절만을 기억하는 증상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는 나이와 시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제가 아니라 어릴 적을 기억한다. 시간은 기억을 통해 구성된다. 육체적 나이와 별개로 정신의 나이는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몇 살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자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노년은 얼마쯤 허구적 개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제는 노년을 거부하지 않는다. 누구도 육체의 늙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정신은 육체가 변해 가는 흐름에 따라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결말은 우리에게 ‘노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돈이 없는 노년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기억이 없는 노년을 생각하면 불행하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발췌할 기억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발생할 기억보다 추억할 기억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러낼 기억을 잘 돌보는 것. 순간의 의미를 잘 축적하는 것이 ETF나 코인만큼이나 중요한 노후 대비가 아닐 수 없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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