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독서
[경향신문]
낡고 부드러운 쿠션에 코를 박듯 가볍게 국경을 넘어간다 일조량은 적으나 쾌적한 습도와 조도를 유지하는 이곳에선 숨쉬기가 편안하다 입국 이후 점차로 외부와 차단된다 숲으로 둘러싸인 성벽의 나라, 골목과 오솔길의 나라 도로표지판도 없이 골목이 골목을 가지치고 샛길이 샛길을 사다리 탄다 방음벽이 두껍다 시계도 없는 이곳에서 눈 비비며 둘러보면 격자무늬 담 밖으로 먼동이 트고 격자무늬 담 밖에서 끼니때가 지나간다 이 친숙한 중독의 나라에서 후미진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으면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람과 마주칠 때도 있다 노동재해 보험국에 근무하며 처마 낮은 푸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만난 적 있다 모퉁이에 몸을 반쯤 감추고 유대인의 짙은 눈으로 뚫어지게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김연숙(1953~ )
누가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했던가. 사실 가을은 ‘산책의 계절’이다. 문밖을 나서면 국화, 코스모스 등 가을꽃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벌과 나비는 꽃과 꽃 사이를 부지런히 넘나든다. 높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색을 갈아입은 나무와 숲은 새 떼로 수런거린다. 바람에 갈리는 갈대의 비명 날카롭고, 참새 떼 몰려다니는 들녘에선 한창 벼가 익어간다. 붉게 노을이 번진 자드락길을 걸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시인이 산책을 즐기는 이유다. 산책은 자연을 읽는 일이다.
독서는 ‘지식의 산책’이다. 책만 펼치면 자는 사람도 있다지만, 시인은 “습도와 조도를 유지”해 금방 책에 빠져든다. “외부와의 차단”은 가족이 다 잠든 한밤에나 가능하다. “숲으로 둘러싸인 성벽의 나라, 골목과 오솔길의 나라”를 둘러보는 사이 먼동이 뜬다. 독서는 중독이다. 오늘 밤 시인이 읽은 책은 카프카의 작품 <성>이 아닐까. 하긴 읽은 책이 무에 중요하겠는가, “뚫어지게 나를 보며 서 있”는 유대인을 만났는데. 시인은 ‘마음산책’ 같은 새벽기도를 드린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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