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형들의 전성시대
[경향신문]
“그럼 그냥 형이라고 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서 상우는 알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키스탄 출신 노동자인 알리가 자신을 ‘사장님’이라고 계속 부르자, 나이를 물어보곤 툭 던지듯 한 말이다. 고객 돈까지 유용한 투자에 실패해 빚더미에 앉은 상우는 상금 456억원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서 알리를 만났다. 상우의 말에 알리는 쭈뼛거리면서 “상우 형”이라고 부른다. 상우와 알리가 한국 사회 최대·최강 관계인 ‘형·동생 하는 사이’로 나아가는 장면이다.
‘형’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의미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나 친척 가운데 항렬이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손윗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형’의 활용법을 한국 사회 곳곳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두번째 의미다. ‘가깝게 지내는 남남의 남자 사이에서 나이 적은 남자가 나이 많은 남자를 정답게 부르는 말.’ 이 두번째 의미는 첫번째 의미가 전제하고 있는 ‘혈연’을 뛰어넘어 ‘남남’ 사이를 묶어주는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
지난해 가수 나훈아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으로 부르면서 ‘XX형’ 현상이 유행한 적이 있다. ‘형’이란 호칭을 붙여 멀게만 느껴지던 인물을 친근하게 느끼게 하고, 서로 소통하려는 사회적 욕구가 발현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긴,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형’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캠프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 ‘석열이형TV’다. 윤 전 총장은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출연자들에게 “석열이 형이라고 불러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형’의 무분별한 활용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간과해선 안 된다. ‘형·동생 하는 사이’가 만들어내는 ‘우리가 남이냐’ 의식은 가족 같은 친밀함을 넘어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고, 끼리끼리식 배타성을 낳을 위험성을 갖고 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이권을 나눠먹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 속에 공공성이나 윤리의식은 희미해지고, 편법과 불법이 싹튼다. 그토록 많은 범죄에 ‘형’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같은 어두운 단면을 최근 한 인물의 입에서 확인했다. 성남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중심인 화천대유의 대주주 김만배씨다. 오랜 법조기자 경력을 가진 김씨는 지난달 27일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뒤 방송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가성은 없었다. 저랑 친하게, 제가 좋아하던 형님들이다. 정신적으로 귀감이 되고 심리적으로 조언하는 멘토 같은 분들이라 모셨다.”
전직 법조인들로 호화 법률고문단을 꾸리고 거액의 고문료를 지급한 데 대한 해명이었다. 화천대유의 자문·고문 변호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법조인은 권순일 전 대법관, 박영수 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별검사, 국정농단 사건 변호인이었던 이경재 변호사, 강찬우 전 수원지검장, 이창재 전 법무부 차관, 김기동 전 부산고검장, 이동열 전 서울서부지검장 등이다. 박 전 특검과 강 전 지검장은 화천대유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남욱 변호사가 2015년 정·관계 로비 혐의로 재판을 받을 당시 각각 변호인과 수사 책임자이기도 했다. 당사자들은 대부분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관계가 없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김씨 등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돈잔치를 벌일 때 ‘뒷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들을 전국에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좋아하던 형님들” 운운하는 김씨의 모습에 기가 찼다. 서로를 “형(님)” “동생(아우)”이라 부르면서 도대체 이들은 어떤 특수관계를 형성하고 특수이익을 공유했을까. 법조인이나 언론인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공사 구분이나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기는 했을까.
공정과 정의가 시대정신이라고 외치고들 있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유사 혈연 네트워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형’ ‘동생’들이 주·조역을 맡아 이권의 단물을 빨아먹은 ‘형님 게이트’이자, 한국 사회에 잔존하는 남성 기득권 부패 카르텔의 축약판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상우 형’은 위선과 배신의 말이었다. 상우는 나중에 알리를 속여 목숨을 내놓게 했다. 자신의 생사와 이득이 걸릴 때는 결국 잘라낸다. 그리고 이내 또 다른 ‘형·동생 하는 사이’를 만든다. 이 카르텔을 깨부수지 않는 한 서바이벌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김진우 정치부장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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