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아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손현 작가·‘글쓰기의 쓸모’ 저자 2021. 10.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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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생일 선물로 아내에게 36시간의 자유시간 쿠폰을 받았다. 만기는 내년 생일. 남들은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지만 지금의 내겐 육아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지난 9월 말, 그중 28시간을 썼다. 캠핑을 간다는 친구의 말을 듣곤 대뜸 동행하겠다고 했다. 캠핑에 관해 아무런 지식도, 장비도 없었는데 친구 덕분에 훌쩍 떠날 수 있었다. “나라면 호텔 갔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이누.” 출발하는 날 이렇게 말한 아내는 나중에 캠핑장 사진들을 보더니 다음엔 자기도 데리고 가라며 말을 바꿨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캠핑장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나중에 듣기론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일러스트=양진경

캠프는 강원도 영월 무릉도원면에 있다. 처음엔 어디기에 지명에 무릉도원을 쓰나 싶었는데, 막상 가보니 지상낙원이 맞았다. 지상낙원에도 키즈존과 노키즈존이 있더라. 친구는 그중 노키즈존을 예약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이 적막함! 양옆에 다른 캠퍼들이 있는데도 구역 전체가 독서실처럼 고요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우리는 멍하니 있거나 책을 읽거나 이따금 대화를 나눴다. 잠시 시계를 봤더니 이런, 시간이 네다섯 시간씩 흐르고 있었다. “너 28시간 겨우 얻은 거잖아. 최대한 깨어있다 가야지.” 친구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날은 일찍 잠들었다.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전반적으로 내 시간의 밀도가 낮아져서 늦게까지 깨어있는 게 별 의미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난 어느새 집으로 복귀해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비록 28분 같은 28시간을 보냈지만 행복했다.

육아를 하며 시간의 상대성을 체감하고 있다. 아이가 잠든 2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거나, 내가 회사에서 퇴근 무렵 꼼지락대는 5분이 육아 교대를 기다리는 아내에게는 50분처럼 느껴서 종종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 증거다. 톰 숀의 ‘크리스토퍼 놀란’에서도 놀란 감독은 시간을 언급한다. “젊은 사람은 향수에 잘 젖어요. 굉장히 빠른 변화를 겪고 있으니까요. 열한 살이나 열두 살 때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곧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두의 인생은 여기저기로 펼쳐져요. 상황은 매우 신속하게 변하고요. (...) 시간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에요. 시간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에요.”

감독의 생각은 ‘인터스텔라’에서 잘 드러난다. ‘인터스텔라’는 시간과 감정에 관한 영화다. 배경은 우주지만, 상대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부모와 자식 사이를 어떻게 갈라놓는지 3시간에 걸쳐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아버지 쿠퍼가 블랙홀 주변을 공전하는 밀러 행성에서 보낸 1시간은 그의 딸 머피가 지구에서 보내는 7년과 맞먹는다. 시간의 흐름은 중력의 영향을 받는데 밀러 행성의 중력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짧지만 강렬했던 자유를 경험하고 오랜만에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면서 아내와 나의 중력과 아이의 중력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쿠퍼는 딸 머피에게 말한다. “우린 그저 아이들에게 추억이 되면 돼.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 이 말은 영화의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만약 아이의 1시간이 나의 7년과 같다면? 내년 봄 아내 복직 즈음 내가 교대로 육아휴직을 쓸 예정이다. 그동안 이 선택이 최선이 맞는지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그 결정에 확신이 든다. 아이의 시간과 내 시간은 분명 다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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