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앗, 나랑 똑같은 옷 입었네’

소현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 2021. 10. 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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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 날 영화를 보러 가던 길이었다. 저 맞은편에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 흔한 국내 브랜드의 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런 민망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 잠시 구매 버튼 누르기를 망설였건만,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저쪽에서도 금방 알아차리고 이쪽을 흘끔대며 지나갔다. 피차 멋쩍은 경험이었을 테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그러고 보면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꼭 나와 같은 옷이 아니더라도, 걷다 보면 계속 마주치게 되는 브랜드들이 있다. 아마 사용하는 쇼핑몰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거다. 우리는 옷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는 무수히 많은데도 사는 옷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옷을 앞에 두고 고민하지만, 사실 취향과 개성을 만드는 곳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는 공간 대부분에는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궤적이 설정돼 있다. 소비 행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유명 쇼핑몰 입지, 각종 프로모션 행사, 최다 판매 아이템 목록 등은 우리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어쩌다 새로운 쇼핑몰을 발견한다 해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앞서 남겨 놓은 궤적으로 인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내가 입었던 맨투맨 티셔츠도 그런 궤적을 따라 돌다가 길에서 동족을 마주하게 된 듯하다.

궤적을 따라다니는 게 꼭 나쁜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앞선 이들을 따라갈 때 가장 실패 확률이 적다는 것을. 매번 과감한 소비로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쇼핑 말고도 스트레스 받을 일은 산더미다. 그렇다고 해도 어쩌다 한 번쯤은 다른 길로 이탈해봐도 재밌지 않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아예 소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상품 구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개성을 표현할 길을 찾아보는 거다. 통장에 돈은 쌓이고 지구는 보호할 수 있는 길이다. 패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소현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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