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길어지는 농한기, 다시 유목으로
[경향신문]
바이러스의 시대를 버텨나가려면 용감히 다른 곳을 탐험하는 여행 유튜버들의 소식이 필수입니다. 최근 흥미를 끈 것은 파키스탄 여행 클립이었습니다. 포장 도로도 없는 벽지 마을은 동네 사람들끼리 친척처럼 보살피며 살아갑니다. 토마토부터 닭에 이르기까지 자급자족으로 먹거리를 준비해 어떤 것도 슈퍼마켓에서 사오지 않는다 합니다. 한두 달 노력해 집을 지으면 누구도 집세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설명에 유토피아가 떠올랐습니다. 태초의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을 터인데 누일 곳과 밥벌이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을에선 일이 있으면 주중이고 없는 날은 주말과 같다 합니다. 그마저 4월에서 9월까지의 이야기고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6개월은 1m가 넘도록 쌓이는 눈 속에 갇혀 각자 집에서 쉰다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른 유튜브 채널 속 파리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8월의 파리는 모든 사람이 바캉스를 떠나 훌륭한 식당은 모두 문을 닫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식사조차 즐기기 어렵다 합니다. 그때 파리에 있는 사람은 관광객뿐이랍니다. 주마간산으로 관광지를 훑고 오는 예전 우리네 휴가와 달리 프랑스 사람들은 한 달도 넘게 한 곳에서 온전한 삶을 경험합니다. 번아웃 되지 않기 위해 1년에 한 번이라도 쉬고 정비한다며 평생 동안 매년 같은 곳을 찾는 일도 많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보면 우리도 꽤 지친 듯합니다.
최근 6년 만에 새로 책을 내어 다시 제 삶이 농번기에 접어든 듯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시던 분들과 새로운 관점을 얻길 원하시는 분들이 청하신 자리에 가서 함께 토론하고 배우는 자리가 늘어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각자의 마음에 결실을 이루기 위한 행위라 힘들어도 뙤약볕 아래 농부처럼 어느 한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고단해도 보람찬 하루를 보내며 착실히 살아온 선배 농군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차오릅니다.
이 또한 지난 2년간 농한기 같은 바이러스 시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생각합니다. 새끼를 꼬며 봄을 준비한 농군과 같이 여유의 겨울이 있어야 봄부터 가을까지의 강행군을 버텨낼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수업시간에 배운 삼모작이 가능하다는 남쪽 나라의 기후를 철없이 부러워했습니다. 노동의 중압감을 치러내는 나이가 되니 그 나라의 사람들에겐 기후의 축복이 시시포스의 천형과 같았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최근 FIRE족이라는 트렌디한 키워드가 우리 사회에 회자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조기에 은퇴하겠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의 농한기를 앞당겨 실행하고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농번기의 중압감보다는, 점점 길어질 듯한 농한기를 내가 지은 농사로는 온전히 버텨내질 못할 거란 공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수명이 늘어나며 인생의 겨울이 길어질 것 같으니 새로운 궁리를 해내는 것이죠.
문득 몇년 전 가본 몽골이 생각납니다. 야생의 대자연은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어 경작을 하기엔 무리라 유목 생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파키스탄 산속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인터넷이 들어오는 것이라 합니다. 삶의 지루함도 걷어낼 수 있을뿐더러 통신이 연결되면 겨울에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에 인터넷은 그들에게 실크로드와 같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유목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의 시대, 디지털 유목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목에서 경작으로, 다시 유목으로 순환하는 역사는 어쩌면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행성 위 모든 곳으로 이주했던 우리 종의 유전자에 남은 적응의 흔적이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다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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