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홍정운군 학교, 노무사 없이 실습업체 '약식 선정' 했다

이유진 2021. 10. 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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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현장실습업체 심사지침 잇단 완화
실습운영위 소위원회 심의만으로 가능케
권익위 개선 권고에도 시정 안돼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서울지부 조합원들이 9일 저녁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지난 6일 현장실습 중 사고로 숨진 고 홍정운군을 추모하는 촛불을 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 6일 전남 여수의 한 요트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숨진 고 홍정운(18)군이 다닌 학교가 전담 노무사도 없이 해당 업체에 대한 심사를 약식으로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교육부가 지난해 ‘효율적 운영’을 이유로 학교현장실습운영위원회(실습운영위)를 약식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지침을 완화했기 때문인데,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 6월 이 지침에 대한 개선 권고를 한 것으로 드러나 교육부의 ‘늑장행정’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10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홍군이 다닌 특성화고는 지난달 16일 학교 전담 노무사, 학부모 위원, 지역산업체 위원 등 외부 위원 3명을 제외한 채 교사 6명만 참석한 실습운영위 소위원회를 열어 해당 요트업체의 현장실습 적격 여부를 심의해 통과시켰다. 노동법이나 산업안전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교사들이 사실상 ‘요식 행위’로 심사를 진행한 것이다.

이는 교육부의 연이은 지침 완화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육부는 2017년 말 제주도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이민호군이 숨진 뒤 노무사가 동행한 사전 현장 실사 뒤 선도기업협의체의 승인을 받고 교육부 또는 시도교육청에서 최종 인정을 받아야 하는 ‘선도기업’을 중심으로 현장실습을 허용했다. 하지만 1년만인 2019년 1월 ‘직업계고 현장실습 보완방안’을 발표하면서 선도기업에 선정되지 않은 기업들도 ‘참여기업’이라는 이름으로 현장실습생을 더 폭넓게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참여기업은 노무사의 현장 실사 없이 학교 심의만으로 선정이 가능하고, 4대보험 가입도 필수 조건이 아니다. 기업 규모 제한도 없어 홍군이 다닌 업체처럼 영세한 요트업체도 선정될 수 있다. 지난해 현장실습생 3명 가운데 1명가량은 참여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했다.

하지만 참여기업이라고 해도 노무사 등이 참여하는 실습운영위 심사를 거쳐야 했는데, 교육부는 지난해 3월 ‘직업계고 현장실습 운영 매뉴얼’을 발표하면서 이 심사마저 노무사 등이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소위원회를 통해 약식으로 가능하도록 지침을 한 번 더 완화했다. ‘너무 잦은 실습운영위 전체 회의 소집에 따른 부담’을 경감하겠다는 게 지침 완화의 이유였다. 이 때문에 요트업체가 현장실습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상태에서 홍군이 현장실습을 받게 된 뒤 사고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경엽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직업교육위원장은 “안 그래도 학교 심의가 ‘요식 행위’라는 지적이 나오는데 직업계고 존폐 위기를 고민하면서 취업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교사들끼리 모여 심사를 하면 안전 문제 등을 견제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권익위가 지난 6월 교육부의 이런 지침 완화에 대해 개선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이를 즉각 시정하지 않았다. 권익위는 교육부에 소위원회 운영의 자율성은 보장하되 운영세칙을 마련해 위임 제한사항을 규정하도록 권고했는데, 교육부는 권익위에 “올해 말까지 매뉴얼 개정을 추진하고 내년 3월 개정 매뉴얼을 배포하겠다”는 내용의 계획서만 제출했다.

이런 식으로 현장실습 업체 선정의 문턱은 거듭 낮아졌지만, 현장실습생들의 안전 강화방안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교육부는 지난해 5월 ‘직업계고 지원 및 취업 활성화 방안’을 내놓고 교사 등을 산업안전전담관으로 지정해 안전한 현장실습과 취업을 위해 기업 실습 환경을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 산업안전근로감독관에게 점검을 요청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권익위가 지난 1월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 결과, 전국 직업계고 가운데 34.8%는 산업안전전담관을 두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방안은 이달부터 3개월 동안 시범운영을 하고 본격 시행은 내년 3월이 되어서야 이뤄진다. 송경원 정의당 정책위원은 “지난해 방안을 발표하면서 바로 시작했어야 했는데 교육부가 전형적인 늑장행정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들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산업안전전담관의 경우 예산 확보와 교육 이수 등에 시간이 걸렸다”며 “(소위원회 심사 가능 지침 완화는) 당시 관련단체 등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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