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판결은 성적순이 아니다

한겨레 2021. 10. 1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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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최한수ㅣ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심성사에서는 어느 특정 시대에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이나 무의식을 ‘망탈리테’(mentalites)라고 부른다. 이는 논리적 사유와 정서적 감정을 포괄하는 개념인데 개인뿐 아니라 특정 집단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만약 누군가가 필자에게 한국 사법부의 망탈리테를 보여주는 한 단어를 선택해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엘리티즘’(elitism)을 꼽고 싶다.

사실 모든 나라에서 판사는 대표적 ‘법률귀족’ 혹은 ‘파워엘리트’에 가깝다. 그렇다면 한국 판사 집단의 엘리티즘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그것은 한국 사법부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법원이 처리하는 사건 수는 지난 30~40년 동안 빠르게 증가해왔다. 본안사건 기준으로 1970년대 초반 30만건이 채 되지 않았던 사건 수는 2000년대 중반에는 약 180만건으로 600%나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사건 처리에 필요한 인프라는 이러한 가파른 증가를 뒷받침할 수준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예산 제약으로 필요한 물적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남은 해법은 이를 최대한 인적 자원으로 메꾸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법원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인재의 안정적 확보에 성공해왔다. 여기에는 “시험을 통한 선발과 근무평정을 통한 인사”라는 인사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문제는 이처럼 법관의 선발과 보직에서 능력을 중요시하는 정도가 강해질수록 순혈주의와 엘리티즘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폐해의 대표적 사례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 사건이다. 이는 재판의 독립성이 외부 세력이 아닌 바로 법원 내부의 엘리트에 의해 침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이들의 상명하복에 대한 ‘무감각적 태도’는 ‘특정 명문대-사법연수원-행정처’라는 순혈주의와 엘리티즘에 근거한 법관 선발제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문제점을 손보는 것이 사법농단 이후 법원의 과제이다.

그러나 최근의 법조일원화를 둘러싼 논란은 법원이 법관의 선발 문제를 ‘안정적 인력수급의 확보’라는 매우 좁은 차원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10년의) 경력 요건을 너무 높게 설정한 탓에 판사 인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주장이나, 판사 구성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김앤장 방지법’을 주장한 이탄희 의원의 문제제기에 대해 이를 당파적 어젠다로 치부하여 시험에 의한 선발만이 정도라고 응수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법조일원화가 법관 부족 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일부의 주장처럼 법조일원화가 본격화된 2018년 이후 임명 법관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2018년 첫해의 39명과 비교해 2020년 158명으로 4배나 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지원자 수인데 2018년 119명에서 올해는 4배가 넘는 515명이 되었다. 만약 이 중 3분의 1 정도를 뽑는다면 2021년 임명 법관의 수는 법조일원화 이전 수준을 넘어선다. 결국 법관 지원자 수의 변화는 자격조건 외에도 지원자 풀의 변화와 선호, 경제환경 등 복합적 요인의 함수라는 것이다.

사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지난 3년간의 법조일원화 시도가 법관의 인적 구성에 있어 ‘김앤장’으로 상징되는 매우 획일적인 후보자만을 뽑는 결과로 이어졌는가에 있다. 대형 로펌에서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업무에 익숙해진 변호사가 판사가 되었을 때 산업재해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기업의 입장을 대변해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원 인적 구성의 다양성은 이미 국외에서는 사법부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제 중 하나이다. 실제 미 의회는 올해 두차례의 청문회를 열어 신뢰받는 판결을 위해 법원의 인종·성별·학력별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인지 강조하는 연방판사와 주 대법관들의 진술을 청취하였다. 영국 법원은 아예 법원의 다양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보고서를 공개하고 있다.

판결은 법리의 해석과 이의 기계적 적용이 주가 아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판결은 대개 판사의 경험과 배경에 의존한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닌 것처럼 좋은 판결 또한 성적순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법원과 의회는 법조일원화가 법관 구성의 다양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문제점에 합당한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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