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

한겨레 2021. 10. 1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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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정나리ㅣ대구대 조교수

이런 자유. 에이(A)부터 제트(Z)까지 9·11 희생자들의 이름이 불리는 걸 네 시간에 걸쳐 봤다. 우연히 보게 된 기념식에서 눈을 쉽게 뗄 수 없었고, 20년이 지났음에도 그날 세상을 떠난 이들을 한시도 잊지 못한다는 유가족들의 흐느낌에 함께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난 적 없음에도 생전 아버지의 사소한 습관까지 닮았단 소릴 듣는다는 장성한 아들, 매일 더욱 그리워한다는 아내, 수호천사가 되어 지켜봐달라는 조카가 호명하는, 발음도 길이도 제각각인 이름 하나하나가 미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이 공적 의례가 어떻게 전개될지 나름의 추측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더이상 미움은 없다, ‘나는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서 당신을 앗아갔지만 ‘우리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했다’는 대목에서 동공이 흔들렸다. 아프가니스탄의 혼돈과 쑥대밭이 된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자신이 아는 미국이란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고 ‘악에 맞서 하나되는 나라’라는 부시의 연설에 마음 한편이 싸늘해졌다.

저런 자유. 10년 넘게 함께하며 내게 발 이상의 동반자가 되어준 ‘꼬마차’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난감하다. 서울에선 딱히 차가 필요 없을뿐더러 오히려 짐이 될 정도의 대중교통망이 있을 텐데(그리 믿고 싶다), 내가 사는 인구 25만의 도시에서는 차 없인 기동력과 독립성을 상당히 잃고 만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을까 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으나 초가을 장마에 차와 사람들 그리고 전동킥보드 틈을 뚫고 다닐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아 시작하지 못했다. ‘보행자 중심’으로 재조직될 거라던 그 길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속도가 서로 다른 탈것들의 공존은커녕 사람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구조화된 길에 자전거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적다. 정기 점검을 받으러 갈 때마다 꼬마차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내게 전문가는 ‘바꾸고 싶어서 바꾸는 거지, 기계는 고쳐 쓰면 평생도 탈 수 있다’ 한다. 내 ‘자유’만큼의 탄소를 배출하는 이 친구를 어쩌면 좋을지 궁리를 하다 보면 내 자본주의적 의식의 흐름은 어김없이 또 다른 소비에 이르고 만다. 정녕 방법은 새로 나온 전기차를 ‘사는’ 것뿐인가.

미국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지만 ‘이런 자유’는 지켰고, 나는 탄소발자국을 남기지만 ‘저런 자유’를 지킨 셈이다. 둘이 다른 방식으로 지키고자 한 ‘사람 사는 세상’의 근대적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못’ 사는 세상을 향한다. 20세기 내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고자 고군분투하였으나, 내 영토 밖에선 민간인 사상자가 나도, 백신이 없어 죽어나도 크게 상관없는 세상을 넘어, 이대로라면 곧 사람이 숨 쉴 수 없는 세상이 올 거라 제주의 산호초와 지리산의 구상나무가 예언한다.

초등학교 때 온실효과로 열이 오른 지구를 그리는 숙제를 했다. 처음으로 어린 내가 ‘무해’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산들에 순식간에 도시가 세워지고 그것들이 새로운 길과 차로 촘촘히 이어지는 과정을 목격했다. 산성비를 맞고 미세먼지를 마시며 점차 가재를 잡던 시냇물과 봄가을 날들을 조금씩 잃었고, 그렇게 이미 인류세와 자본세의 절정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우리 일상적 삶이 터 한 인공구조물 및 체제가 필연적으로 함께 맞물려 돌아가고 있음을 경험했다. 21세기 툰베리들에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애써 덤덤해져야 했다. 이제 겨우 직시하는 건 미국인들이 하나되어 물리칠 ‘악’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대선 주자들이 소리 높여 다툴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다면 함께 총력, 전력을 다해야 할 의제는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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