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人 이즈백] 역대 최강의 프로토스, 프로토스의 상징 '무결점의 총사령관' 송병구 ①

권성준 2021. 10. 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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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송병구ⓒMHN스포츠 이지숙 기자

(MHN스포츠 권성준 기자) 지난 4일 ASL 시즌 12 16강 C조 경기를 끝으로 '무결점의 총사령관' 송병구의 17년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송병구는 2004년 프로게이머가 된 후 2005년 'EVER 스타리그 2005'에서 데뷔했고 이후 스타크래프트 1을 대표하는 프로게이머가 됐다.

송병구에게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까? 스타크래프트 1에서는 송병구라는 이름 세 글자가 프로토스를 상징한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이번에는 이제 막 은퇴한 총사령관 송병구를 만나 영광의 시절을 되돌아봤다.

- 안녕하세요. 최근 근황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역에서 은퇴하고 개인 방송을 계속하고 있어요. 지금 인터뷰하는 당일 기준으로 어제 공식적으로 열리는 스타크래프트 1 대회를 안 나가는 은퇴...? 개인 방송을 하고 있어서 은퇴라는 말은 애매하긴 한데 제 나름대로 은퇴의 기준을 정해서 했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 파트너 BJ로 있어서 '아프리카TV'에서만 방송을 했는데 10월부터 반납을 했어요. 그래서 '유튜브'랑 '트위치', '아프리카TV' 세 군데서 방송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 프로게이머 데뷔를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스타가 재밌고 잘하고 싶어서 하다가 우연치 않게 제 실력의 위치를 알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그게 2002년인가 2003년인가 그랬는데 WCG라는 대회가 온라인 예선을 했어요. 제가 정확하게 연도가 기억이 안 나는데 중학교 2학년 때니까 2002년일 거예요. (2002년 WCG가 맞음)

2002년에 온라인 예선을 해서 점수제로 인당, 그러니까 계정 아이디당 1게임인가 2게임씩 제한되어 있어요. 상위 점수 몇 명을 커트라인을 둬서 대전에서 오프라인 예선을 했는데 제가 점수 커트라인에 들었어요.

아쉽게도 부모님이 허락을 해주지 않았어요. 참가는 못했지만 그 대회로 인해서 '제 실력이 집에서 혼자 했는데도 게이머 분들이랑 할만하구나, 한 번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죠.

사진=송병구ⓒMHN스포츠 이지숙 기자

- 현역 시절 송병구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프로게이머였습니다. 뛰어났던 선수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는데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있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요? 저는 게임밖에 몰랐었던 것 같아요. 선수 시절 삼성 팀에 처음 들어와서 놀랐던 게 팀이 좀 자유로웠어요. 근데 다른 팀은 듣기로는 닭장 시스템이라고 많이 하죠. 가둬 놓고 게임만 했는데 저희 팀은 반대로 너무 자유로웠어요. 제가 들어가면서 저희는 그런 (자유로운) 시스템으로 점점 변하는 과정이었어요.

자유로운 시스템에선 보이더라고요. 자유롭게 풀어놨을 때 스스로 열심히 하는 사람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 게임이 취미였고 재밌어서 시작했는데 이걸로 돈을 벌게 되니까 오히려 그 돈으로 다른 취미가 생기고 빠지는 사람들을 곧잘 봤어요. 결과적으로 스스로 의지가 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다 잘 되더라고요. 저도 그런 부류가 아니었나 싶어요.

- 송병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상의 자리에서 롱런을 한 것입니다. 그냥 롱런이 아니라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합니다.

사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수용하는 데 있어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위 선배분들은 새로운 트렌드 같은 것을 잘 못 받아들이더라고요. 제가 신인일 때 저도 느끼는 게 있잖아요? 선후배로 실력이 나뉘는 게 아니라 게임은 경력과는 무관하게 이기는 사람이 잘하는 거죠. 그런데 동생이나 후배가 얘기하면 무조건 틀렸다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저는 연습생같이 연습 도와주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 대회 나갈 때 좀 보완하는 식으로 응용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느새 긴 세월 동안 게임을 했고 결과가 좋게 나왔던 것 같아요. 물론 노력도 바탕이 돼야 하고요.

사진=송병구ⓒMHN스포츠 이지숙 기자

- 송병구의 플레이 스타일은 안정적이고 단단한 운영을 하다가 한 방으로 경기를 이기는 경우가 많다고 평가받습니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을 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다른 사람 스타일을 플레이하면 잘 안되더라고요. 운영 스타일은 견제나 이런 것에서 동떨어졌던 게 딱히 안 해도 이기기도 했었고 그리고 제 스스로 '손이 많이 가는 플레이가 꼭 필요한 플레이인가?'라고 많이 느끼긴 했었어요. '왜 굳이 손이 더 많이 가는 작업을 하지? 나는 할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고 시기의 차이도 큰 것 같아요.

제가 좀 애매한 타이밍에 데뷔했어요. 올드 선배분들과 드래프트 세대 중간에 낀 세대에요. 당시에는 맵이라던가 선수분들의 빌드, 테크트리 그런 게 정말 정석이 없는 프리스타일의 시대였다 보니까 그런 것이 승패를 크게 좌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 송병구 선수의 위상에 비해 의외로 손 속도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느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런 평가가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선수 때 기억에 남는 점이 리플레이 분석 파일 같은 것이 어느샌가 배포되면서 손 속도라는 말이 나왔어요. 제가 처음 신인일 때는 가끔 온게임넷이나 MBC 게임에서 선수 개인화면 틀어줄 때 손 속도 노출되는 것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프로그램이 나오고 나서부터 넘버링, 손 속도에 대해 사람들이 '손 빠른 게 정답이고 넘버링은 이게 정석이고 이렇게 해야 한다' 약간 표준을 만들었어요.

APM은 잡손질까지 포함한 것이고 EAPM이라고 있는데 저는 그게 APM이랑 차이가 없었어요. 10~20밖에 차이가 안 났는데 손 빠른 선수들은 100~200씩 차이가 났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왜 APM으로 얘기하냐 잡손질 빠진 EAPM으로 얘기를 하자'라고 했는데 팬분들이나 커뮤니티, 선수들도 그렇고 항상 APM으로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 점에 있어서 좀 섭섭하긴 했어요.

- 현역 시절 기록을 보면 모든 종족전에서 승률이 특출나게 높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테란전 승률이 높습니다. 역대 테란전 승률 1위를 기록한 프로토스 프로게이머이기도 합니다. 유독 테란전에서 강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그런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그전은 어느 순간 힘들어지긴 했지만 연습 때는 항상 모든 종족전 승률이 좋았거든요. 근데 아무래도 테란전은 좀 이해가 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프프전 같은 경우는 워낙 실력차가 나더라도 빌드에서 갈릴 수 있고 해서 타종족전에 비해서 승률이 안정적일 수가 없는데 테란전은 뭔가 종족에 대한 이해 같은 게 잘 되다 보니까 오히려 상대하는 입장에서 어떤 게 까다롭고 하는 걸 이해했어요. 저그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진=WCG 2007 우승 당시 송병구 WCG

- 송병구 선수 별명 중에 '송순신'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줘서 붙여진 별명인데 유독 국제 대회에서 더 강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실 스타 1은 국제 대회에 나가면 보통 2~3명이 참가를 하는데 그 2~3명 밖에 경쟁자라고 생각이 안 들어요. 그래서 국내의 대표 예선전이 곧 금메달 결정전 같은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약간 양궁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올림픽 무대보다 국가 대표 선발전이 더 힘든 느낌이죠. 그래서 운 좋게 국가 대표 자리에 갔어요.

솔직히 거기서는 저랑 같이 간 선수들을 이기면 되는데 그 별명이 붙을 때는 이상하게 한국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한테 졌었어요. 샤쥔춘 선수하고 다른 한국 선수 한 명을 제가 이기기도 했고, 대진운도 좋았어요. 그렇게 별명이 생길 수 있는 스토리가 제 의도와는 별개로 만들어지다 보니까 운 좋게 좋은 별명이 생긴 것 같아요.

- 송병구 최고의 명경기로 꼽히는 경기는 09-10 신한은행 프로리그 이제동과의 매치포인트 혈전이 있습니다. 초반 저글링과 스탑 러커에 피해를 많이 보고 불리해진 경기를 전투로 역전을 이뤄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경기를 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 경기가 에이스 결정전이잖아요? 위너스가 아니라 그냥 프로리그 방식에서 맞죠? 제동이가 나올 걸 알았어요. (다른 팀은) 맞춤 카드로 강한 팀에서 '얘가 나오면 얘, 쟤가 나오면 네가 하고' 이런 전략이 있는데 저희 팀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종족 상성이 불리해도 저였어요.

오히려 에이스 결정전인데 상대가 좀 약체팀이고 다른 강팀에 비해서 수월한 팀이다 하면 그때 저를 안 쓰더라고요. 저는 에이스 결정전 나갈 때 마음이 항상 불편했었어요. 왜냐하면 항상 강한 상대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대체자가 없다 보니까요.

그래도 한번 잘 해보자 결국에는 승패가 중요한 거고 그런 생각 같은 건 변명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했었어요. 그때가 워낙 긴장되는 무대였고 현장에 시청자, 팬분들도 많아서 되게 떨렸었어요. 그래서 저글링 난입이 되고 되자마자 '아 망했다, 졌다'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감독님이 그런 것을 좀 싫어하세요. 당시에 졌다고 게임을 던지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 이런 것을 좀 싫어하셨고 저도 준비한 것이 있는데 그것 (저글링 난입) 때문에 다 꼬였거든요.

모든 게 안되니까 최선을 다해보자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할 만하더라고요. 싸우는데 계속 이기니까 '이렇게 돼서는 안되는 게임인데 왜지? 좀만 더 열심히 해보자, 해보자'했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사진=이제동과 경기 당시 송병구 온게임넷

무엇보다 그 경기가 명경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게임도 재밌기는 했지만 제동이가 땀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 화면에 멋있게 나와가지고요. 그때 이기고도 상처받은 말이 있어요.

당시 용산에서 경기를 했을 텐데 숙소가 역삼동인가 그랬어요. 그래서 1시간 정도 거리를 가는데 팀 코치형이, 지금은 롤 감독인 최우범 코치 형의 형수님께서 "어 봤는데 패자가 더 멋있는 경기 처음 봤다"라고 했어요. 같은 팀 코치형의 형수님께서 한 그 말을 전해서 제가 듣게 됐어요.

"어 형 저도 땀 흘렸는데 얼굴에는 땀이 안 나고 패딩을 입어서 몸에 땀이 나고 있었다. 저도 열심히 했어요 형" 이랬었는데 이겨 놓고도 팀원들이 상대팀이 더 멋있다고 하니까 약간 상처를 받았었죠.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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