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 하나로 인간 욕구를 채울 수 있다면

한겨레 2021. 10. 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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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 아임 유어 맨
완벽한 파트너로 설계된 로봇은
흠 많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인간성은 갈망과 불안 사이에서
서로 기대고 돌보며 발현되는 것
영화 <아임 유어 맨>은 사용자의 행복을 위해 설계된 휴머노이드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의 원천을 탐색한다. 라이크콘텐츠 제공

당신의 뇌를 스캔해서 3D 프린터로 찍어낸 것처럼 완벽한 이상형이 눈앞에 나타났다.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패션 감각, 와인 취향, 그리고 종교에 대한 철학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다. 그런데 그는 사람이 아닌 로봇이다. 선택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그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돌려보내고 ‘그가 없는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마리아 슈라더의 <아임 유어 맨>(2021)이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류학자 알마(마렌 에거트)는 결혼, 직업, 인권, 시민권 등의 의미를 새롭게 쓰게 될 역사적인 실험에 참여 중이다. 바로 ‘완벽한 배우자’로 설계된 휴머노이드가 과연 인간 파트너를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알마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제품이 시판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살피기 위해 법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한다. 이 실험에 자원한 전문가들은 로봇과 3주간 동거를 한 뒤 감정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개인적인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떠맡은 알마는 자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작한 ‘맞춤형 로맨스 파트너’ 톰(댄 스티븐스)의 존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알마가 톰과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사흘이다.

마음대로 끄고 켜는 사랑?

찰나와도 같았던 화양연화가 지나가고 알마는 톰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감정서를 작성한다. “파트너 로봇은 욕망을 채워주고, 고독을 쫓아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인간성의 원천은 갈망을 가지고 불안을 견디는 것 아닐까요? 버튼 하나로 우리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면 누가 자기 자신에게 맞서고 갈등을 견디며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갈까요?” 사실 알마의 평가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영화 초반부터 강조되지만, 그의 지극한 슬픔이자 근원적인 두려움은 “혼자서 쓸쓸하게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마에게 톰이 약속하는 배반 없는 파트너십, 영원한 사랑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알마는 톰과의 관계가 ‘인간적이지 않다’고 평가한다.

<아임 유어 맨>은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를 떠오르게 한다. 다가올 미래에 어떤 법적,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아직은 인간 유사품 이상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인공지능(AI)과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아 있다.

<그녀>에서 아내와 별거하고 사무치게 외로운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인 사만다(스칼릿 조핸슨)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테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그와 함께하는 사만다는 테오의 일상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각종 잡무를 처리해주고, 그의 메모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판사에 출간 제안서를 보내는 고난도의 창작 작업까지 도맡아 한다. 사만다는 똑똑하고 발랄하다. 동시에 아직 인간 세계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때로는 ‘순수한 소녀’ 같기도 하다. 이처럼 ‘완벽’할 수가 없는 애인이다.

<아임 유어 맨>의 한 장면. 라이크콘텐츠 제공

흥미로운 것은 테오와 알마 사이의 차이다. 그는 알마가 톰을 거절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만다를 원한다. 사만다는 껄끄러울 것 없는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그녀>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체로 자존감이 낮거나 침울하고, 과도하게 관계에 집착한다. 다들 테오의 눈에는 어딘가 이상하고 불완전하다. 그런 인간 여자들이 지긋지긋해진 상황에서 사만다만이 테오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자신이 제공하는 데이터에 따라 스스로 유저-맞춤형으로 발달해가는 사만다와 함께 자신만의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를 조각한 셈이다. 더군다나 이 ‘진짜 사랑’은 “버튼”을 눌러 언제든지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다.

알마는 톰의 인간성을 부정하면서도 종내에는 ‘인간-아닌’ 존재로서 톰을 존중하게 되었지만, 테오는 오히려 사만다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테오가 그러하였으므로 사만다도 결국 정보처리 속도가 떨어지는 테오를 떠난다. 테오에게 배운 사랑에는 배려와 인내란 단어가 없었다.

<그녀>가 테오와 사만다라는 자율적인 주체를 상정한 뒤 섬처럼 고립된 두 존재의 ‘뜨거운 사랑’을 탐색한다면, <아임 유어 맨>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동반자 관계’를 탐색한다. 그러면서 돌봄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 역시 사뭇 달라진다. 전자가 돌봄노동을 사랑이라는 말로 가려버리는 반면 후자는 돌보는 일의 일상성을 포착하고, 이를 통해 존재들 사이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과 갈등, 고통 등 부정성의 문제를 사유한다. 알마는 사적인 공간에 침입해 들어온 톰의 신체적 현존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보살펴야 한다.

<그녀>의 한 장면. 더쿱 제공

의존과 돌봄이란 인간성의 핵심

아버지는 알마에게 “혼자 죽는 두려움”을 매 순간 환기하는 존재이면서 돌봄의 의무를 실천하게 만드는 대상이고, 알마 본인 역시 아버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취약한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톰을 아버지에게 소개해주려 데려갔던 날, 알마는 아버지에게 농담처럼 말한다. “아버지, 자꾸 말 안 들으시면 이 로봇을 간병인으로 두고 아버지와 함께 살게 할 거예요.” 스치듯이 지나가는 이 대사는 알마의 은밀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마는 톰을 떠나보낼지언정 그에게 그 ‘성가신 존재’를 떠넘기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의존하고 돌보는 일이야말로 알마가 감정서에 써내려간 인간성의 핵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학술단체 ‘더 케어 컬렉티브’의 <돌봄선언>은 ‘돌봄’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케어’(care)의 어원인 caru에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과 함께 <아임 유어 맨>을 보며 ‘나’를 연장해 다른 존재와 연결하는 곤란, 그 부정성의 가치를 담고 있는 돌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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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_ 손희정 영화평론가가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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