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일본은행 총재 탄생했지만..위상에 비해 성과는 미흡[글로벌 현장]

2021. 10. 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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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시 물가상승률 목표치 2% 달성 못할 것 확실시..신임 총리와 어떤 관계 맺을지 관심사
[글로벌 현장]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제 31대 총재는 지난달 29일로 일본은행 139년 역사상 최장수 총재가 됐다.(/연합뉴스)

구로다 하루히코(79) 제31대 일본은행 총재가 9월 29일 일본은행 139년 역사상 최장수 총재가 됐다. 1946년 6월~1954년 12월까지 재임한 이치하다 히사토 총재의 3115일 기록을 70여 년 만에 다시 썼다.
 
역대 31명의 일본은행 총재 가운데 5년의 임기를 연임한 인물은 구로다 총재가 셋째다. 내년 4월까지인 임기를 모두 채우면 일본은행 역사상 유일하게 재임 기간이 10년을 넘긴 총재가 된다.
 
‘역대 최장수 일본은행 총재 구로다’는 일본 헌정 사상 최장기 정권(7년 9개월)이었던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내각과 이를 계승한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유산이다. 10년 가까이 일본의 통화 정책을 주도하며 일본은행의 존재감을 부각시켰지만 성과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주식회사 일본’ 최대 주주로

구로다의 일본은행은 상장지수펀드(ETF)를 적극적으로 매입해 자본 시장의 큰손이 됐다. 작년 말 기준 일본은행의 ETF 보유액은 51조5093억 엔(약 551조원)으로 약 1년 만에 20조 엔 가까이 늘었다. 도쿄 증시 1부의 시가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를 넘었다. 47조 엔어치의 주식을 보유한 일본 공적연금(GPIF)을 제치고 ‘주식회사 일본’의 최대 주주가 됐다.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 가운데 주식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곳은 일본은행이 유일하다. ‘주가 정권’이라고 불릴 정도로 증시에 민감했던 아베 전 일본 총리 내각이 2012년 12월 집권 이후 부양책을 강화한 결과다.

올 3월 말 일본은행의 자산은 714조 엔으로 구로다 총재 취임 이후 5배 이상 급증했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3배에 달한다. 일본·미국·유럽연합(EU)·영국 등 4대 중앙은행 가운데 총자산이 GDP를 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1044조 엔에 달하는 일본 국채의 48%를 일본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행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양적 완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구로다의 일본은행은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에 발맞춰 ‘차원이 다른(異次元) 금융 완화 정책’을 10년 가까이 펼쳤다. 시중에 돈을 무제한으로 풀어 일본을 만성 디플레이션에서 탈출시킨다는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임 기간 동안 물가 상승률 목표치인 2%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 확실시된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 4월 기자 회견에서 임기 중 2% 물가 상승 목표치를 달성하기 어렵게 됐다며 “시간이 걸려서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9월 22일 금융정책결정회의 뒤 기자 회견에서는 “지금과 같은 금융 완화 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경제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은 더욱 낮았을 것”이라며 “정책 운용은 틀리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구로다 바주카’ 약발 없었다

구로다 총재는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내각이 들어선 이듬해인 2013년 3월 취임했다. 일본은행에 대규모 금융 완화를 요구하던 아베 당시 총리는 디플레이션 탈출에 적극적이었던 구로다를 총재에 기용했다.

도쿄법대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 경제의 사령탑인 대장성(현 재무성)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구로다 총재는 관료 시절부터 일본은행의 소극적인 금융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구로다 총재는 취임 직후인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일본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하는 이차원 금융 완화를 시작했다.

그는 “2년 정도 이내에 2% 물가 상승률을 달성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금융 시장은 구로다 총재의 과감한 정책을 ‘구로다 바주카포’라고 평가하며 환영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주가는 급상승했다. 

일본 재정법은 일본은행이 국채를 직접 사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재정 파이낸스’를 금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일본은행에 돈을 찍어 내게 하는 바람에 재정이 파탄 나고 경제를 심각하게 혼란시켰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행법도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명시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금리와 물가를 적정 수준으로 유도하기 위해 국채를 시장에서 간접적으로 매입하는 것일 뿐 정부의 채무 사정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 정책은 사실상의 재정 파이낸스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비슷한 상황의 다른 나라 중앙은행 총재들이 재정파이낸스로 오해받지 않도록 발언을 조심하는 반면 구로다 총재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정부에 협력한다’는 표현을 쓴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지적했다.

정작 핵심인 물가 상승률은 2014년 초반 1.4%까지 반짝 올랐을 뿐 그해 후반부터는 8년째 1%를 밑돌고 있다. 2016년과 2020년은 물가가 줄곧 마이너스였다.

구로다 총재는 국채 매입량을 더욱 늘리는 추가 금융 완화(2014년 10월), 여유 자금을 일본은행에 예치하는 은행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마이너스 금리’ 도입(2016년 2월) 등 특단의 대책을 잇따라 내놓았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장기 디플레가 정착되면서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관행이 됐다”는 설명을 반복했다. 장기 침체인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면서 일본인들이 물가가 오르지 않는 디플레이션에 익숙해져 통화 정책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푸념이었다.

반대로 이례적인 통화 정책에 따른 부작용은 커졌다. 초저금리의 장기화로 은행 등 금융 회사의 수익성이 악화됐다. 결국 일본은행은 연간 80조 엔 규모의 국채를 매입하는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고 금리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통화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은행이 물가와 싸우는 사이 디플레 탈출의 ‘발주자’인 아베와 스가 총리는 다른 행보를 이어 갔다.

아베 전 총리는 2019년 국회에서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 거의 모두 취업한) 완전 고용이 실현됐기 때문에 금융 정책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말했다. 고용만 개선되면 물가 상승률 목표는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였다. 스가 총리 역시 휴대전화 요금 인하를 간판 정책으로 내걸며 물가에 하향 압력을 가했다.

금융 시장은 2013년 이후 주요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모두 승리했기 때문에 아베와 스가 내각이 2% 인플레 목표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고 분석한다. 아베노믹스가 연출한 엔화 가치 하락과 주가 상승 덕분에 유권자들의 지지율이 오른 덕분이다.

두 총리는 선거 승리로 통화 정책이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물가 상승률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한 시장 관계자는 “유권자에게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나쁠 게 없기 때문에 정치권도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했다.

구로다 총재는 최근 기자 회견에서도 남은 임기 동안 “금융 완화를 끈질기게 이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9월 29일은 일본의 새 총리를 사실상 결정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일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신임 일본 총리가 구로다 총재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금융 시장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작년 9월 16일 스가 총리 내각이 출범했을 때 구로다 총재는 아베 총리와 동반 퇴진설을 부인하고 “남은 임기를 모두 채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본은행 출신인 아다치 마사미치 UBS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경제 성장을 위해 물가 목표와 재정 확장뿐만 아니라 생산성과 잠재 성장률 향상이 중요하다“며 “일본은행의 싱크탱크 기능을 활용해 성장에 필요한 거시 경제 정책을 제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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