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은 생각
[크리틱]
[크리틱] 김영준|열린책들 편집이사
추리소설의 황금기인 1920년대까지 명탐정은 대체로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고독한 천재들이었다. 인간이 풀 수 없을 것 같은 기괴한 사건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이는 필요한 자격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탐정 이야기가 너무나 허황되고 천편일률적이 되다 보니 독자들이 외면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오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온 개선책이 동화 같은 살인이 아니라 현실적인 범죄를 제시하고, 이를 평범한 탐정이나 형사가 해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추리소설이 신화에서 소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들 주인공도 평범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천재가 아니라는 것뿐이지 도덕성이나 용기를 보면 일반인들이 추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1920년대 개혁가들에 의한 수술은 성공을 거두어, 추리소설은 생명이 연장되고 100년이 지나도록 번영하는 장르가 되었다.
천재 탐정 대신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도 괜찮다면, 평균적 일반인보다 훨씬 결함이 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 실제로 이런 실험을 해본 작가들이 있었다. 1960년대 영국 작가 조이스 포터가 창조한 도버 경감은 ‘역사상 최악의 무능 탐정’으로 불린다. 그는 능력도 최악이지만 성품도 그에 못지않은, 한마디로 동료로서는 악몽과 같은 인물이다. 사건은 도버의 활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과 걷잡을 수 없는 소동에 의해 해결되기 마련이다. 도버 시리즈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로써 무능 탐정의 전성시대가 열리지는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 추리소설을 좀 더 현실에 접근시키는 시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버의 수사기법은 런던 경시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간결하다는 장점이 있다. “남편이 살해되었다면 범인은 아내야!” “아니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죠.” 부하가 참을성 있게 대꾸한다. “십중팔구는 그래.” “네, 그래도 나머지 1할의 경우가 있잖습니까!” “자네가 열 건의 살인사건 중 아홉 건을 해결해보게. 서른살이 되기 전에 경시총감이 될걸.” 이런 설정이 좀 뻔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실제 소설은 분위기가 묘하다. 도버가 덮어놓고 찍은 용의자가 왠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점 더 진범 같아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이다. 저 인간이 내린 결론이 정답이 되면 안 되잖아? 분명히 무슨 속임수가 있겠지! 독자가 도버와 자신의 판단이 일치하는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소설은 대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독자의 신중함이 잘못된 게 아니다. 혐오스럽거나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인물이 어떤 문제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그건 당혹스러운 일인 게 맞다. 어떤 비틀린 논리가 그를 인도했을지 모르며, 혹은 지금까지 내가 그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다. 독자라는 건 얼마나 순수하고 공정한 자리인가. 현실에서는 보통 이러지 않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 없이 ‘그 악당도 진실에 굴복했다’고 간단히 정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에 있는 경우, ‘그 악당조차 그 문제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서 특별한 정치적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이 가치는 너무 매력적이라 우리 편에서 알뜰히 이용하지 않기가 어렵다.)
이를 도버식 대화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악당도 우리같이 말했다면 그 말은 100퍼센트 옳아!” “그럼 이제 악당도 우리 편인가요?” “미쳤나? 절대 아니지.” 우리의 현실 판단은 크게 믿을 바가 못 된다. 우리의 판단력이란 책 읽을 때 쓰려고 최적화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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