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검열 빠져나가기

한겨레 2021. 10. 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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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기사나 책에서 문제될 부분은 종교나 과학, 섹스가 아니고 북한과 공산권의 소식과 사상, 그 못지않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비판 등 두 가지 주제였다. '기관원'은 검열, 원고나 기사의 통제를 위해 매일 아침 기자보다 먼저 신문사에 출근했고 모든 신간과 중간들은 기록과 통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검열을 위해 문공부에 제출해야 했고 '납본필증'을 받지 못하면 '금서'가 되었다.

김병익|문학평론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놓고 여와 야, 정부와 언론계가 한참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나는 마침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검열관들>(방영록 옮김)을 읽고 있었다. “국가는 어떻게 출판을 통제해왔는가”란 부제를 붙인 이 신간의 저자는 우리에게 <고양이 대학살>이란 재미있는 화제로 잘 알려진 하버드대학 사학자 로버트 단턴이다. 18세기 프랑스 지식사회사의 뛰어난 연구자로 딱딱한 이론적 분석보다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체로 서술함으로써 한 시대의 큰 전개과정을 흥미롭게 재현하는 미국 ‘신사학’의 주도자이다. 이 석학이 이번에는 시야를 18세기의 프랑스에서 19세기의 인도, 20세기의 동독으로 넓혀 그 각각의 도서 검열의 실제를 재현하고 있다.

프랑스의 18세기는 루소, 디드로 등 계몽주의자들이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비판하는 저술들을 왕성하게 출판하고 그 성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킨 시대다. 그러나 백과전서파를 중심으로 한 구체제 비판이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검열은 왕조 권력 비판만이 아니라 신학, 철학, 과학 등 사상과 학문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 새로운 사조 전반에 대한 루이 왕권과 교회 억압이 무척 넓고 깊었다. <검열관들>에 의하면 인쇄기가 한창 확장되던 이 시기의 숱한 저술들을 검열하기 위해 출판총국은 문학인들을 많이 동원했다. 그러니까 서로 알 만한 지식인·문인들이 원고를 검토하는 것이기에 저자와 검열인 간의 토론도 왕성했고 그래서 양자의 합의로 수정되는 예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고도 허가 없이 출판된 불법 도서는 서점 판매대 아래 혹은 거리 도서판매인들의 망토 안에 감추어져 거래됐다.

프랑스의 도발적인 저자들을 위해 다행이었던 것은 출판 허락이 나지 않은 원고를 이웃 벨기에나 영국에서 책으로 낼 수 있다는 것인데 볼테르가 프랑스 밖에서 오래 살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프랑스 검열의 역사에서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 기욤 말제르브이다. 대법관의 아들인 그는 도서정책의 총책인 출판총감으로 1750년부터 13년 동안 재직했는데 그 자신 계몽주의에 동조적이었다. 그는 <백과전서> 원고들이 경찰에게 압수당할 처지가 되자, 디드로에게 “프랑스에서 가장 안전할” 자기 집으로 몰래 옮겨오도록 권해 숨겨주었다. 그는 공포 혁명기에 기요틴으로 처형되었지만 그 혁명을 유발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백과전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이었다. 역사는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성취된다.

19세기 영국은 멀리 떨어진 광대한 인도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여러 언어로 발간되는 현지 도서들을 치밀하게 검열해야 했다. 그런데 두 가지 난점이 있었다. 가혹하게 식민 통치를 하고 있지만 정작 영국 본토는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가 활발하게 주장되고 제도화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인도 총독은 식민지에서의 언론 탄압을 되도록 소리 죽이며 수행해야 하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딜레마를 치러야 했다. 게다가 식민 인도 내부는 문맹자가 압도적이어서 비판적인 발언은 책을 통해서보다 시골 하층 패거리들의 즉흥 공연에서 더 많은 민중적 호응을 얻었다. 총독부가 인쇄소를 폐쇄하더라도 그 효과를 제대로 얻을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20세기의 동독은 호네커 정권 붕괴, 서독과의 통일 후에야 비로소 강력한 비밀경찰 조직과 함께 치밀한 도서 검열 실태가 폭로되었다. 당국의 지시를 받아 원고를 검토해야 하는 검열관들이 같은 작가동맹 회원이었기에 문제가 있다 싶으면 표현만 아니라 그 밑에 숨은 사상까지 삭제, 수정, 보완을 위한 토론이 벌어지게 된다. 작가들을 위해 다행스러웠던 것은 공산 치하의 소련처럼 횡행한 사미즈다트(유통 가능한 원고)가 서독으로 넘어가 출판될 수 있고 그 책들이 동독으로 숨어들어온다는 것. 공산국가에서 가장 부유했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전범으로 보이고 싶은 동독의 국가적 체면 때문에 모질게 비판 서적을 탄압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기자로, 필자로, 편집자로, 발행자로 35년 동안 책과 인연을 맺어온 나로서는 이런 과정과 결과를 보며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해방 후 분단의 엄혹한 냉전체제와 군부의 독재 통치 등을 겪었다. 나 역시 초등 교육 이후 50년 동안 단턴이 묘사한 여러 형태의 갖가지 통제를 받으며 ‘검열의 문화사’를 살아온 것이다. 기사나 책에서 문제될 부분은 종교나 과학, 섹스가 아니고 북한과 공산권의 소식과 사상, 그 못지않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비판 등 두 가지 주제였다. ‘기관원’은 검열, 원고나 기사의 통제를 위해 매일 아침 기자보다 먼저 신문사에 출근했고 모든 신간과 중간들은 기록과 통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검열을 위해 문공부에 제출해야 했고 ‘납본필증’을 받지 못하면 ‘금서’가 되었다.

나는 검열 통과에 제법 센스가 있어 가령 ‘위대한’ 마르크스 저작이란 번역문을 ‘문제적’ 마르크스 저작으로 고치고,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첫장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본문 수정 전혀 없이 제목만 ‘1840년대의 소외론’이란 “눈 감고 아웅 식”으로 바꾸었는데 요행 그게 판금의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 내 이름으로 발행된 모든 책의 초고나 초교지를 내가 직접 보았고 그 덕분인지 판금 처분된 책은 기적적으로(!) 거의 없었다. 물론 우리 검열관들이 반공과 유신정권의 특정 주제의 문면만 피상적으로 주목하는 무지와 게으름 덕이 컸다. 그랬던 나도 정작 내 책 하나가 판금되고 말았다. <지성과 반지성>이 3쇄 납본(‘판’과 ‘쇄’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을 하고서 뒤늦게 금서 딱지가 붙은 것이다. 김지하의 ‘오적’에 대한 한 신문 사설의 황당한 비난을 ‘반지성’의 사례로 인용한 것이 들켰던 것 같다.

1990년대 문민정부가 수립되면서 검열이 사라지고 금서도 없어졌는데 관의 아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출판인들의 집요한 저항과 정치적 민주화 덕분이었다. 운동권 서점의 매대 아래 도서 판매 효과도 활발했지만, 동구에서 사유화가 허락되지 않은 복사기가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롭게 보급된 사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책도 복제할 수 있어 ‘금서’의 강제를 지우는, 권력에 대한 기술상품의 승리였다. 오늘날의 사정은 달라져, 관의 사전 검열이 아니라 독자들의 무지·무책임의 ‘사후 검열’인 ‘댓글’이 걱정이다. 그럼에도, 검열의 억압 속에서 대혁명은 발발했고 인도는 해방되었으며 동독은 사라지고 만 사례는 출판의 자유를 억제한 정권이란 끝내 패배한다는 분명한 역사적 교훈으로 여전히 환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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