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뒤안길

한겨레 2021. 10. 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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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이었나? 시작은 멋있었다.

1959년,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쿠바의 부패한 독재자 바티스타를 몰아냈다.

혁명이 성공한 직후에는 둘 사이가 막역했으나, 게바라가 쿠바를 떠날 무렵에는 카스트로가 게바라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게바라는 쿠바를 떠난 뒤 다시 게릴라가 되어 콩고에서, 볼리비아에서 혁명 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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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나는 역사다] 체 게바라(1928~1967)
체 게바라(1928~1967)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이었나? 시작은 멋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이고 의대생이었는데, 의사가 되지 않고 남의 나라 쿠바에 가서 게릴라가 됐다. 천식을 앓았지만 의지가 굳었다. 안락한 길을 버리고 힘든 길을 갔다. 사람들이 상상하던 혁명가의 모습이었다. 1959년,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쿠바의 부패한 독재자 바티스타를 몰아냈다. 혁명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현실은 생각 같지 않았다. 권력을 잡고 보니 신경 쓸 일도 많았다. 게바라는 국립은행 총재가 되어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의욕이 지나쳤다. 경제적 자립의 실험은 실패했고, 쿠바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1961년에 쫓겨난 독재자의 잔당들이 쿠바를 침공할 때 그 뒷배를 봐준 나라가 미국이다. 소련과도 편치만은 않았다. 1962년에 미국 본토를 노리는 소련의 미사일을 쿠바에 놓기로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없던 일이 되었다.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다행이지만, 게바라는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소련을 믿지 못할 나라로 생각했다. 1965년에는 카스트로와도 결별하고 쿠바를 떠났다.

눈길을 끄는 논문이 있다. 카스트로가 게바라를 언급하며 사용한 표현들을 분석해, 카스트로와 게바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헤아린 1988년의 연구다. 혁명이 성공한 직후에는 둘 사이가 막역했으나, 게바라가 쿠바를 떠날 무렵에는 카스트로가 게바라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게바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미국에 대해서만큼이나 멀었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논문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갈라선 이유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외교 노선의 차이일 수도, 권력 다툼일 수도, 감정싸움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게바라가 정말로 ‘세계 혁명’을 꿈꾸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바라는 쿠바를 떠난 뒤 다시 게릴라가 되어 콩고에서, 볼리비아에서 혁명 운동을 했다. 게바라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의 정보기관이 달라붙었다고 한다. 그가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체포된 날이 10월8일이다. 10월9일에 총살당했다. 서른아홉의 나이였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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