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허세에서 고백으로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2021. 10. 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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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월남의 하늘 아래 메아리치는/ 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에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러/ 삼군에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초등학교 시절, 파병군들을 위한 군가는 유행가처럼 사랑받았다. 맹호·청룡·백마부대는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다. 중학교 시절,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들려준 교사가 있었다. 베트콩들에게 한국 군인들이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줄 때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처형하는 방법이었는데, 너무 잔인해서 여기에 옮길 수가 없다. 선생님은 자기도 그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면서, 평범한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광기에 휩쓸리며 살인 기계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증언했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드라마 <D.P.>를 보면서 그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쟁을 위해 조직된 폐쇄 집단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괴물이 되어버릴 수 있는지를 정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국 남자들의 대부분이 몸소 겪은 현실이고, 군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지겹도록 접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왜 새삼스러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는가. 군대 이야기라면 금방 싫증내는 여성들이 열심히 시청한 까닭은 무엇인가.

똑같은 경험도 어떤 모드로 풀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러티브가 된다. 핵심은 성찰이다. 죽도록 고생한 일들을 떠벌리면서 위세를 부리는 이야기는 소음이 되기 쉽다. 하지만 폭력에 길들여지거나 거기에 저항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면을 짚어가는 이야기는 선물이 된다. 중학교 선생님이 들려주신 전쟁 체험이 지금까지 여운으로 남는 것은 단순한 무용담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악마로 변신해간 자신을 객관화했기 때문이다. <D.P.>가 남다른 울림을 주는 것은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지평 위에서 마음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들에게 병영의 기억은 어떤 무늬로 저장되어 있는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언어로 재생되는가. 크고 작은 트라우마의 역사적 뿌리를 더듬으면서, 성년기의 출발점에서 군대 생활을 통해 자아가 형성된 경로를 복기해야 한다. 부당한 명령에 굴종하고 자기 또한 부조리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뒤틀린 인격은 생애 전반에 어둠으로 드리운다. 치유되지 않은 내상(內傷)은 사회적으로 증폭되고 또 다른 가해로 확대 재생산된다. 아동학대, 배우자 구타, 학교폭력, 성희롱, 갑질, 왕따, 직장 내 괴롭힘….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D.P.>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대사다. 가혹행위를 일삼아온 황장수가 전역한 후에 자신을 납치하여 총을 겨누면서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피해자에게 겁에 질려 내뱉은 말이다. 솔직한 대답일 수 있지만, 비겁한 변명이기도 하다. 관행에 핑계를 대는 습성이 수많은 비리와 폭력을 낳았다. 일차적인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고 반성할 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 있는 폭력의 문화 유전자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라떼는’류의 과시와 허세를 거두고, 자기 안에 깃든 취약함과 모순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받아들이자.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는 길은 그 고백에서 시작된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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