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의 詩편지](50) 빈 병을 사랑하며

이해인 수녀 2021. 10. 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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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빈 병을 보면
늘 가슴이 뛰어요
보석함은 아니지만
동그랗고 귀여운
갸름하고 우아한
날카롭고 화려한
여러 모양의 빈 병들을
모으고 나누면서
행복을 파는 선물가게 주인으로
일생을 보냈어요
어떤 이들에겐 들꽃을
어떤 이들에겐 조가비를
어떤 이들에겐 성서나
시의 구절을 적어
빈 병에 넣어 주면
그들은 별것도 아닌 게
예쁘네 아름답네
웃으며 감탄했고
나는 흐뭇했어요
이렇게 저렇게
빈 병들을 나누고 나니
이제는 내가
하나의 빈 병으로 서서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네요

- 신작시

한때는 유치원의 교실이기도 했던 저의 널찍한 작업실에는 여러 종류의 빈 병이나 빈 통들이 많아 제발 이젠 그만 모으고 좀 버리라고 동료들이 핀잔을 주지만 크고 작은 빈 병들은 늘 저를 설레게 하는 ‘선물담기 대기조’ ‘나눔 위한 기쁨조’라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해인 수녀

제대로 갖추어진 꽃병이 아니라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 있는 음료수병을 잘 씻고 리본을 묶어 그 안에 작은 들꽃을 꽂거나 앙증스러운 조가비 몇 개를 담고 시가 있는 미니 카드까지 곁들여서 축일을 맞이하는 수녀나 오랜 시간 투병 중인 수녀에게 들고 가면 좋은 선물이 됩니다.

지금도 숨어 있는 빈 병을 몇 개 찾아놓고 무엇을 담아 누구에게 줄까 즐거운 궁리 중입니다. 이런 일이 습관이 되다 보니 다른 수녀님들도 자주 찾아와서 ‘예쁜 빈 병 하나 주어보세요. 이 방엔 쓸모없이 쓸모있는 병들이 많잖아요’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수녀회 설립 90주년을 지내면서 새로 만든 가족앨범을 보니 500명도 넘는 전 회원들 중에 저의 서열이 50번 안에 드는 그야말로 큰언니에 속하는 원로임을 새삼 가늠하며 세월의 빠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부 손님 초대 없이 소박하게 치른 미사와 감사 축제 프로그램에서는 제가 축시를 낭송하면서 100주년에는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기에 더 잘 들어달라고 부탁하니 이왕이면 살아서 100주년 시도 써서 낭송하라는 덕담을 해 웃었습니다. 수련소 자매들의 노래와 춤, 젊은 수녀들의 단막극도 있었는데 그중 제일 인상적인 것은 영상을 띄워놓고 과거와 현재의 수녀가 만나서 짝이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예전의 미리암 수녀님과 현재의 미리암 수녀가 사진상으로 함께한 것인데 이런 식으로 수십명의 주인공들이 짝을 지어 등장하니 절로 숙연해졌습니다. 마치 죽은 이들이 부활한 모습을 본 듯한 오래된 그리움과 반가움에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언젠가는 내 수도명도 어느 후배가 받아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겠구나 생각하니 이 순간의 살아있음이 더욱 소중해 어느새 스스로 빈 병이 된 마음으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비어있음으로/ 종일토록 너를 그리워할 수 있고/ 비어있음으로/ 너를 안아볼 수 있는 기쁨에/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고 싶은 나/ 닦을수록 더 빛나는/ 고독의 단추를 흰 옷에 달며/ 지금은 창밖의 바람소릴 듣고 있다/ 너를 만나기도 전에 어느새 떠날 준비를 하는 오늘의 나에게/ 꽃이여 어서 와서/ 한 송이의 이별로 꽂혀다오.’ -시 ‘빈 꽃병의 말’에서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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