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RNA 세상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2021. 10. 7.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딱 세 집단으로 나뉜다. 세균, 고세균 그리고 진핵세포이다. 세균과 고세균을 뭉뚱그려 원핵세포라고 하면 이제 생명체는 둘 중 하나에 속한다. 대장균은 원핵세포이고 그보다 덩치가 훨씬 큰 데다 뒷발로 걷는 인간은 진핵세포 소속이다. 문자 그대로 진핵(眞核)세포는 핵이 있는 생명체를 일컫는다. 술 빚는 효모와 남산 위 소나무에는 핵이 있는 반면 원핵세포에는 핵이라 부를 만한 구조가 없다. 흔히 ‘씨 도둑질은 못한다’고 말할 때 씨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바로 핵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원핵세포에는 유전자가 없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대장균도 자식 대장균에게 물려줄 유전자를 갖지만 이를 둘러쌀 강보 같은 핵이 없을 뿐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어떤 세포든 무슨 일을 하려면 단백질을 만들어야 한다. 움직이려면 근육 단백질인 액틴과 미오신이 톱질하듯 서로 도와야 하고 산소를 운반하려면 헤모글로빈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기에 세균이건 사람이건 세포 안에서는 리보좀이라 불리는 단백질 제조 공장이 바삐 돌아간다. 하지만 벌써 2년 가까이 인류를 옥죄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는 리보좀이 없다.

바이러스는 본디 기생적이다. 생명체에 몰래 숨어든 바이러스는 숙주의 리보좀을 훔쳐 단백질을 만들고 연거푸 자신의 유전체를 복사한다. 이렇듯 여러 벌 분신으로 둔갑한 바이러스는 세포를 뚫고 나와 새 숙주를 찾아간다. 코로나19를 무력화하려면 밀접 접촉을 피하라는 명제의 생물학적 근거가 바로 저 기생성에 있는 것이다.

숙주라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겠는가? 세균들은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를 발명하여 바이러스에 대처했다. 2020년 크리스퍼 연구에 노벨상을 부여한 과학계는 줄곧 유전자 가위에 방점을 두었지만 사실 핵심은 크리스퍼에 있다. RNA인 크리스퍼가 바이러스 유전자와 빈틈없이 결합한 뒤 잘라야 할 곳을 거푸 타격하면서 세균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실 1960년대부터 유전자 가위는 끊임없이 발견되었다. 지금껏 과학계는 가위가 아니라 잘라야 할 곳을 선별하는 ‘탐지’ 기술의 부재에 어려움을 겪어온 것이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세균들이 난제를 해결했다. 인간은 그것을 찾아내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한글 자판에서 ‘RNA’를 두드리면 ‘꿈’이다. 생명체 대물림의 실체인 유전자와 단백질 중간에서 중개자 역할을 맡는 RNA는 화학적으로는 유전자와 비슷하지만 효소 활성을 나타내는 단백질 구실도 하는 까닭에 꿈처럼 환상적인 물질이라 할 수 있다. 세균은 자신의 영토를 침범한 바이러스 유전자를 잘라 RNA를 만들었고 그것을 끈끈이풀로 삼아 재침입한 바이러스를 원천봉쇄한다. 세균은 과거에 마주친 적을 기억하고 그들을 격퇴할 전대미문의 무기를 진화시켰다.

사람들도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면역계를 즉시 출동시켜 준동을 제어하는 한편 항체를 만들어 바이러스의 증식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선봉대가 나서 잘라낸 바이러스 단백질을 거푸집으로 삼아 그것과 아귀가 맞는 항체를 공들여 제작하는 것이다. 항체 포승줄로 바이러스를 결박시키고 이를 제거하면 우리 면역계의 임무가 완결된다.

현대 인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면역계를 돕는다. 백신을 사용하는 일이다. 병원성을 현저히 떨구고 인간의 면역계를 조련할 목적으로 제작된 백신은 전통적으로 초주검시킨 바이러스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균(死菌) 말고 좀 더 효과적으로 면역계를 훈육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바로 이 순간 RNA와 함께 카탈린 카리코 박사가 등장했다.

2005년 ‘면역’에 수록된 논문에서 카리코는 어떤 종류의 RNA는 인간의 면역 반응을 촉발하지 않는다는 현상을 보고했다. 일반적으로 세균의 RNA는 우리의 일차 면역계의 기찰 대상이다. 세포벽을 구성하는 세균의 지질다당류도 마찬가지다.

세균의 이러한 고분자 화합물은 인간 세포에는 없거나 다른 방식으로 가공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와 남의 구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면역세포는 ‘나’의 RNA를 본체만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달이 난다. 오랫동안 한 우물만 고집했던 카리코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코로나19의 외벽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가짜 RNA를 주사하여 마치 바이러스가 침입한 양 인간 세포를 속인 것이다. 성실한 인간 면역계는 코로나19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었다. 카리코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RNA 메이크업’의 비밀을 즐겼다. 온통 RNA 세상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