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지지를 강요하지 마라

이용욱 논설위원 2021. 10. 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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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의도 국회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 한국 정치의 본질은 투쟁이며, 대화와 타협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제한된 권력을 두고 여러 세력이 다투는 정치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한국의 정치토양은 특히 척박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보수의 시대는 탄핵으로 허물어졌지만, 좀 다를 줄 알았던 진보세력도 민주를 외쳤던 과거를 잊은 듯 독주한다. 요즘의 정치세계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살벌한 서바이벌 게임의 룰에 의해 움직여지는 듯하다.

이용욱 논설위원

그럼에도 이런 난장판 선거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선판이 여야 유력 주자와 연관된 대형 스캔들로 온통 뒤덮였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얽힌 대장동 개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겨냥한 고발 사주 의혹은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다. 당장 막바지에 이른 더불어민주당 경선은 대장동 의혹을 연일 문제 삼는 이낙연 전 대표와, 같은 편끼리 너무하다는 이 지사 항변만 부각된다. 감동의 경선 드라마를 원했던 여권 수뇌부의 속은 쓰릴 것이다.

국민의힘이라고 다를까. 윤 전 총장의 고발 사주 연루 의혹은 윤 전 총장 측근인 손준성 검사의 관여 정황이 드러났다는 검찰 발표가 나오면서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윤 전 총장의 비틀거리는 틈을 홍준표 의원이 파고든 것도 달갑지 않을 것이다. 당내 일각은 막말과 좌충우돌 행보로 본선 경쟁력에 물음표가 붙는 홍 의원의 부상을 우려한다. 홍 의원을 비판했던 일부는 반드시 되갚는 홍 의원이 복수에 나설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스캔들의 등장인물은 늘어나고 줄거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졌다. 국민의힘 소속이던 곽상도 의원은 아들이 대장동 의혹의 핵심인 ‘화천대유’에서 퇴직금 5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의원직 사퇴를 발표했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누나가 윤 전 총장 아버지의 집을 산 사실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반면 고발 사주 의혹은 여권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제보자 조성은씨와 두번 만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보 사주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폭로를 기획했던 쪽이나, 쟁점화한 여야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전개일 것이다.

물론 대장동과 고발 사주 의혹은 엄중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스캔들 대 스캔들’의 대결 구도가 선거판을 뒤덮고, 여야 유력 주자가 상대방을 향해 “내가 당선되면 너는 감옥행” “봉고파직시키겠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더 답답한 것은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까지, 이런 모습을 억지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수라장의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선거의 불확실성을 꼽는다. 여권 주자인 이 지사가 지지율 1위를 달리지만, 정권 재창출론보다는 정권교체론이 높게 나오는 등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여론지형이 여야의 극한 대결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여야의 명분 없음과 곤궁한 현실이 난장판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여야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자답해보라. 도와달라고 할 자격이 있는가. 촛불정부를 자처하는 여권은 오만과 독선, 위선과 내로남불의 덫에 빠졌다. 여권의 지리멸렬 덕분에 회생 기회를 잡은 야권은 게으르고 시대착오적이다.

결국 내세울 것 없는 여야가 차악을 자처하면서 이토록 후진 선거판이 만들어졌다. 여야가 대장동과 고발 사주 의혹을 놓고 다투는 것도 어느 스캔들의 죄질이 더 나쁜지를 따져보자는 ‘차악 경쟁’으로 비친다. “부패한 수구세력을 찍을 것이냐”는 여권이나, “정권을 심판하려면 우리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야권의 속셈은 똑같다. 그나마 덜 나쁜 우리를 찍으라는 도둑심보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한 여권이 야권을 향해 수구세력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다. 야권 또한 정권을 심판할 자격과 능력을 갖췄는가. 여야는 스캔들에도 지지율이 올랐거나 유지됐다고 강조하지만, 강경 지지층이 결집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에서 호들갑 떨 일은 아니라고 본다.

여야는 선거에 임하는 자세부터 바꿔라. 현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나라를 만들지 설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저런 세력을 찍으려 하느냐’는 식으로 지지를 강요하는 행태는 그만두라. 여론조사 뒤편에 있는 다수의 정치혐오만 깊어질 뿐이다. 이대로라면 ‘투표하지 않을 권리’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역대 대선 최저 투표율(63%)을 기록한 2007년 대선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현실이 될까 두렵다.

이용욱 논설위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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