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성을 물려줄 것인가

한겨레 2021. 10. 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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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숨&결] 이길보라|영화감독·작가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

한국 혼인신고서를 일본인 파트너에게 통역하다 말문이 막혔다. 결혼 후 아이를 낳게 되면 성을 어머니의 성으로 할 것인지 묻는 항목이었다. 파트너는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닌데 왜 지금 정해야 하는지 물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국경이 닫혀 장기간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배우자에 한해 신규 입국 비자를 발급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어 그러기로 했다. 문제는 혼인신고가 아니라 자녀의 성이었다. 평소에는 어느 성이든 상관없다고, 아이만 잘 자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던 파트너가 모계 성을 물려주자고 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 이름에 내 성씨는 없는 거잖아. 아쉬운데.” 평소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아이를 낳을 계획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던 파트너는 갑자기 말을 바꿨다.

나는 부모의 성을 함께 쓴다. 어머니 길경희와 아버지 이상국의 이야기가 나를 이룬다는 걸 자각한 뒤의 일이다. ‘이보라’는 부모가 준 이름이고 ‘이길보라’는 내가 선택한 이름이다. 후자가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애착을 느낀다. 성차별적인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이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을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이길’이나 ‘길이’로 바꿀 수는 없기에 호적상의 이름은 ‘이보라’다. 모계 성을 물려주기로 한다면 자녀는 ‘이’라는 성을 따르게 된다. 특별히 이씨 가문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자녀가 부계 성을 따르는 한국 사회의 성차별적인 관습을 끊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들이 모계 성씨를 따르고 양성 쓰기를 해야 한다. 고로 아이를 낳는다면 모계 성을 물려주겠다고 주장했다.

파트너는 가족 모임에서 논의해보겠다고 했다. 일본은 부부를 중심으로 한 호적제도를 만들어 가족이 하나의 성씨를 정해 부부와 자녀가 같은 성씨를 쓴다. 그러나 96% 이상의 부부가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성차별적인 부계사회다. 외국인의 경우 가족의 성을 따르지 않고 개별 성을 쓰는 것이 허용된다. 예상과는 달리 파트너의 아버지는 어떤 성을 쓰든 상관없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결혼 뒤 남편의 성씨로 살아온 어머니는 돌아가신 시부모님이 가문의 대가 끊겨 속상해할지도 모른다며 말을 줄였다. 파트너는 장남이다.

우여곡절 끝에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 담당자가 잘못 기입했다며 서류를 돌려줬다. 실수가 아니라고 엄마 성을 물려줄 것이라 하니 아래를 가리켰다. 동의자 항목이었다. 모계 성을 따르겠다고 하면 남편과 아내를 비롯해 양쪽 부모 모두가 이름을 적고 서명해야 했다. 부계 성을 따르면 추가 절차 없이 접수가 가능했다. 성차별적이었다.

무엇보다 결혼과 출산, 자녀의 성씨는 부부가 결정하는 문제다. 어째서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민원을 넣겠다고 옥신각신하자, 담당자가 남편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민법상 자녀가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고. 급한 것 같은데 대충 꾸며서 제출하고 아이에게 모계 성을 주면 되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하루빨리 비자를 신청해야 했다. 얼렁뚱땅 서류를 제출했다. 나는 일본에서 외국인이기에 가족의 성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한국에서는 남편이 외국인이라 모계 성을 물려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지만 이상하다. 두 사회에서 정상가족 혹은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밀려난 기분이다.

혼인신고를 한 것뿐인데 어쩌다 보니 자녀의 성이 정해졌다. 아이는 일본에서는 한국인의 성을 쓴다는 이유로 놀림받을 것이고 한국에서는 아버지가 일본인이라 차별받을 것이다. 어디에서든 모계 성을 쓴다는 이유로 무수한 질문을 받을 테다. 언젠가 부모 성을 함께 쓰거나 이름을 바꾸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 또한 충분한 고민과 협의가 있다면 가능하다. 누구의 성을 물려주고 어떤 이름을 쓸 것인가. 관습에 저항하는 시도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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