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양파님,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사랑한 한끼]
[경향신문]
‘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많은 어린이가 그렇듯 어릴적 나도 편식을 했다. 채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싫은 건 양파였다. 처음부터 양파를 제일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기억이 또렷하다.
엄마가 소불고기를 해줬다. 고기만 야금야금 빼서 밥 한 공기를 뚝딱했다. 양파를 요리조리 피해 떠낸 국물을 끼얹어 야무지게 비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뜨려고 했을 때 엄마가 나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내가 남긴 양파를 자기 숟가락에 모았다. “아, 해.”
두려운 순간이었다. 양파 더미가 올려진 숟가락이 입술 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꾹 닫힌 앞니를 엄마가 숟가락 모서리로 두드렸다. “아, 하라니까.” 무서워서 이를 열었고 숟가락이 들어왔다. 양파 더미를 씹는데 눈물과 함께 구역질이 났다. 엄마는 다시는 내가 양파를 뱉지 못하게 했다.
그다음부터 양파를 먹는 건 언제나 고역이었다. 그 시절엔 학교도 편식하는 아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식판 위에 잔반을 남긴 학생을 붙잡아 세웠다. 내가 뜬 것도 아닌 밥, 국, 반찬을 남김없이 먹어 치워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밥 한 숟갈과 ‘꿀꺽’ 삼켜 넘기곤 했지만 양파는 언제나 마지막에 남았다. 무르죽죽한 양파를 입에 머금은 채 화장실에 가서 다시 뱉었다. 그러고 나면 온종일 입에서 양파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서른 살이 되기까지 입맛은 차근차근 변했다. 다른 채소는 물론이고 양파까지 먹게 됐다. 연어회와 함께 먹는 생양파, 너무 좋다. 부침개에는 꼭 절인 양파를 곁들어야 하고 오일파스타에는 양파를 볶아 넣어야 제맛이다.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어니언링을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장르’의 양파를 사랑하게 됐지만 딱 하나, 물에 빠진 양파만은 상대하지 않았다. 짬뽕에 들어간 양파도 싫고 김치찌개에 들어간 양파도 싫었다. 어니언 스프? 절대 싫다. 전골에는 양파를 넣어서는 안 된다.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엄마 탓을 좋아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것만은 확실히 불고기 양념에 절은 양파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대학 심리학개론 수업에서 ‘맛 혐오’라는 걸 배웠다. 음식을 먹으면서 한 경험이 맛과 함께 학습돼 특정한 맛을 가진 음식을 먹으면 혐오 반응을 일으키는, 뇌의 자연스러운 작용이라고 했다. 먹고 탈이 난 음식을 다시 먹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맛혐오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의 뇌는 엄마의 폭력적인 편식 교정 때문에 물에 빠진 양파의 특유의 식감과 냄새를 싫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사람이 싫어하는 음식 하나쯤은 있어도 된다는 마음으로.
최근 여러모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이 발생했다. 연애다. 연애가 나를 물에 젖은 양파까지 먹게 할 줄은 맹세코 몰랐다.
비건 중식당에서 시킨 짬뽕이 문제였다. 애인이 다정하게 개인 그릇에 덜어준 준 짬뽕에 양파가 가득했다. “나 물에 빠진 양파 안 먹어, 왜냐면…”이라고 구구절절하게 말하기 민망하기도 했고, 양파를 피해 면을 뒤적거리는 편식쟁이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후루룩, 면과 함께 양파를 빨아들였다.
웬걸, 맛있었다. 내가 아는 짬뽕의 맛이 실은 양파의 맛이었나? 밀가루의 눅눅함과 대비되는 아삭한 식감도 좋았다. 살짝 시원한 맛도 났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의 숟가락 위 양파와 이별하고 그릇 속 애인이 떠준 양파와 제대로 인사를 나눴다. 우리 구면이지요? 그동안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다음 차례엔 좀 더 용기를 내 볼 작정이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우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양파는 젓가락으로 먹어야 하겠지? 숟가락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창천동불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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