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창업 여전히 '비포장길'..대기업 위주 경제구조 혁신해야"
[벤처·스타트업 활성화하려면]
수직적인 하청 구조 등 수술 필요
대학은 '논문을 위한 논문' 근절
실험실 내 기술들 사업화 촉진을
인재유치 위해 스톡옵션 과세 ↓
사회 전반적 '기업가 정신' 고양
경제·사회 활력소로 만들어야
“창업 생태계가 지난 20여 년 새 조금씩 나아져 이제는 결정적 걸림돌은 없지만 여전히 자잘한 방해 요소가 도처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가 정신을 고취하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벤처·스타트업이 뛸 수 있게 혁신하는 것이 큰 과제입니다.”
지난 5일 열린 제1회 대학 기업가 정신 토크 콘서트 인하대편에서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는 “창업 생태계를 길에 비유하면 큰 장애물은 정리했지만 아직도 울퉁불퉁하다. 실리콘밸리 같은 고속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1988년 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과 박사과정일 때 4만 달러의 종잣돈으로 원자현미경 기업을 창업해 1997년 1,700만 달러에 매각한 뒤 귀국해 다시 파크시스템스를 창업, 2015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그는 “현재는 연 30% 안팎의 고성장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재창업했을 때 인맥도 좋고 영어도 잘되고 고국에서 하는데도 미국보다 굉장히 힘들었다”면서 “비합리적 제도, 대기업 위주의 수직적 경제구조, 우수 인재 부족으로 고생했다. 한때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며 한미 간 창업 생태계를 비교했다. 실례로 그가 미국에서 창업했을 때 지도교수부터 흔쾌히 좋다고 한 반면 한국의 부모와 지도교수, 선배들은 하나같이 말렸다고 했다. 그가 지금은 고인이 된 지도교수인 캘빈 퀘이트 스탠퍼드대 교수 팀의 일원으로 반도체 공장이나 연구소 등에서 쓰이는 원자현미경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뒤 기업의 수요가 적지 않은 상황이라 승산이 있었지만 반대가 심했다. 모교인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직에 응모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전해보고 안 되면 교수직을 찾아도 늦지 않다’고 판단, 박사과정 친구와 함께 월셋집을 얻어 차고에서 실험하고 문간방을 사무실로 썼다. 이때 스탠퍼드대 후배나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출신 인재들이 ‘대기업보다 더 재미있겠다. 스톡옵션도 많이 주니 좋다’며 합류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조그마한 기업은 별 볼일 없다는 편견이 심한데 실리콘밸리는 그렇지 않다”며 “한국에서 재창업했을 때 인재를 구하기 힘들었다. 다만 병역특례 요원이 도움이 됐다. 이것이 한이 맺혔다. 그래서 지금은 직원 복지·보상·근무 환경을 대기업보다 낫게 했다. 유망 벤처는 대기업보다 낫다는 인식이 퍼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벤처·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는 벤처·스타트업이 강소기업으로 크는 데 지장이 많아 경제의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기업가 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대기업에서 기술과 인재를 빼가거나 수직적인 하청 구조를 통해 협력 업체를 쥐어짜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1987년 이전 정부의 집중 지원을 받은 재벌에 경제력이 집중되며 자본·인력·시장·기회·정보 독점이 가속화해 새로운 기업이 뿌리내리기 힘든 환경이 조성됐다”며 “하지만 그 모델로는 한계가 뚜렷해 이제는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경제·사회적으로 대대적인 혁신을 해야 한다. 혁신가·개척가가 새 길을 열 수 있도록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벤처·스타트업이 인재를 유치할 수 있도록 스톡옵션 차익에 매기는 과세를 재고하고 행사 가격 자율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대학에서는 기업가 정신을 고취하고 영어에 능숙하며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인하대 공대 박사과정 출신인 서동진 미로 대표는 “8년 차 창업 기업인으로서, 창업은 정말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이라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며 “스타트업은 개발·자금·인력 모두 어려운 문제라 대학과 유관 기관이 나서 창업 생태계와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완전히 분리해 세척할 수 있는 부유식 가습기를 개발한 데 이어 가전 분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서 대표는 우리 사회에 가습기 살균제 공포가 적잖았던 때 완벽하게 세척할 수 있는 가습기라는 역발상을 통해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고 했다. 그는 “천식으로 고생하던 딸을 위해 전자 제품인데도 완전히 세척이 가능한 가습기를 개발했다”고 했다.
그는 현재는 내수는 물론 해외시장을 활발히 개척하고 있으나 창업 2년 만에 외주 공장이 전소해 거액이 묶여 망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시장성 있는 아이템, 세 명의 공동 창업자 간 호흡과 기업가 정신, 대학과 유관 기관의 지원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술회했다. 그는 “제조 스타트업이 힘들지만 세 대표가 개발·생산·품질·영업·마케팅·고객서비스·자금·경영을 나눠 효과를 발휘했다. 생산은 외주를 줘 개발·마케팅에 주력해 왔다”며 “다행히 국내 시장이 작아 대기업이 장악하지 않은 분야라 안착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날 토크 콘서트에서는 여전히 ‘논문(특허)을 위한 논문(특허)’ 관행이 근절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학에서 기업가 정신과 기술 사업화를 촉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대학 실험실 창업 1호인 박희재 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대학에서 교수·연구원·학생이 차별화된 기술과 핵심 역량을 통해 경쟁력을 만들어야 한다”며 “대학은 혁신가, 글로벌 기업가를 양성해 우리 경제와 사회에 활력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명우 인하대 총장은 “실상 한국의 대학에서 당장 사업화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많지는 않은데, 단순히 논문 쓰고 특허만 내서는 절대 안 된다”며 “벤처 1세대를 많이 배출한 인하대는 실용 학문에 대한 기풍을 만들도록 인센티브를 주고 창업 플랫폼을 만들어 창업 활성화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역설했다. 학생뿐 아니라 교수 창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하고 성공하면 학교에 대한 기부도 늘어날 것이라는 게 그의 기대다. 이기안 인하대 창업지원단장은 “의대 교수 중 인공지능(AI)에 3D 프린팅을 접목해 지난해 IPO(SCM생명과학)한 곳이 나오고,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이돈행 교수)도 상장을 준비 중”이라며 의대와 공대 등의 융합 연구 필요성을 거론했다.
황철주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은 “대한민국·기업·대학 모두 재창조해서 행복을 만드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라며 “젊은이들이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정부와 대학이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환 서울경제신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경제의 성장 엔진과 동력은 창업과 기업가 정신에서 나오는데 여건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며 “12월까지 10개 대학을 순회하는 토크 콘서트가 기업가 정신을 고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천=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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