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詩:選)>사람과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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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무엇과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자의 발걸음으로 귀가한다./ 패배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음에 있는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음에 있는가.() 오늘의 패배는 구태여 찬비를 맞지 않는 데 핵심이 있건만/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밤새 세월이 새끼손가락쯤 들어올려서 패대기를 쳤는지/ 잔뜩 두들겨 맞은 몸으로 잠깨는 아침.'
종일 포장했는데도 남은 일이 더 많고 어느덧 퇴근 시간.
남은 일 걱정에 혹시 늦었을까 화들짝 놀라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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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무엇과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자의 발걸음으로 귀가한다./ 패배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음에 있는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음에 있는가.(…) 오늘의 패배는 구태여 찬비를 맞지 않는 데 핵심이 있건만/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밤새 세월이 새끼손가락쯤 들어올려서 패대기를 쳤는지/ 잔뜩 두들겨 맞은 몸으로 잠깨는 아침.’
-이현승, ‘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에는 없는 인생’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한 기업체로부터 단체 시집 구매 주문이 들어왔다. 직원들에게 선물할 거란다. 좀처럼 없는 일이다. 한 달 치 판매량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포장도 배송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배부른 소리다. 요즘 같은 때 그 절반만 돼도 감사한 일이다. 기한 내에 완료하겠다고 장담했다. 시집 목록과 배송 주소를 받고 정리하고 나니 시한이 얼마 남지 않게 됐다. 명절 연휴 탓에 포장재 받는 데 또 며칠 허비하고 말았다.
종일 포장했는데도 남은 일이 더 많고 어느덧 퇴근 시간. 함께 일하던 직원들 하나둘 퇴근하고 밤 창문처럼 깜깜해진 나만 남게 됐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처음에는 호기로웠고 나중에는 서러워졌다. 먼저 퇴근한 직원들을, 허구한 날 오더니 하필 오늘은 오지 않는 친구들을, 철야는커녕 고작 자정인데 부치는 체력을 원망했다. 얼추 정리해놓은 시간은 새벽 네 시. 나는 “패배한 자의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었다. 남은 일 걱정에 혹시 늦었을까 화들짝 놀라 깼다. 서점은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직원들이 일찍 출근해 매조져 놓은 것이다. 간밤 원망은 씻은 듯 사라지고 피로도 잊은 채 반성했다. 어젯밤 감정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미운 것도 토닥여주는 것도 다 사람이다. 사람과 사는 게 삶, 인생이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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