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분의 1초, 찰나의 만남에서 찾은 자유"
영화촬영, 행복하지만 무섭고도 어려운 일
오롯이 혼자인 '사진'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영화보다 무한한 상상력 갖게 해주기도
놀랄만한 비경보단 평범한 일상속 '낯섦' 담아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은 '아름다움'
사각 프레임 속 ‘고정된 시간’엔 ‘낯선 순간’들이 채워졌다. “카메라를 메고 이어폰으로 크게 노래를 들으면서 미친 듯이 걸어다녀요. 두리번거리다 마주치는 찰나의 만남이죠.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눌러요.”
낯익은 일상이 전복되는 ‘찰나’는 기묘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가지런히 접혀 옹기종기 모인 하얀 파라솔(페이스(Face) 16). “산책길에 만났어요. 조금 있으면 손님들을 맞으러 뿔뿔이 흩어질 텐데... 웅성웅성 소리를 내는 유령 같더라고요.” 사진에선 ‘영화의 법칙’들은 덜어냈다. 치밀하게 계산해 정교하게 직조한 영화의 복잡성은 사라졌다. “심사숙고하거나 수학적 부분을 고심하지 않았고”, 찍는 순간만큼은 “본능에 기댔다”. 때로는 여러 장을 찍기도 하지만, 대체로 두세 번만 찍고 ‘다른 만남’을 찾아간다. “내성적이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해 영화감독 일을 포기한 적도 있다”는 그에게 ‘정지된 화상’은 자유이자 해방이었다.
“영화는 여럿이 함께 한다는 점에서 참 행복하지만, 의견을 조율하고 결론을 잘 도출하는 리더십 강한 사람이 아니라 힘든 일이기도 해요. 몇십, 몇백 억을 들이는 만큼 무섭고 어려운 일이고요. 그런 것에 비해 사진은 참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요. 저 혼자 책임지고, 제 시간만 날리고,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니까요.”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해 ‘공동경비구역JSA’(2000),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아가씨’(2016)로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된 박찬욱이 첫 사진전(12월 19일까지)을 연다.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만난 박 감독은 “감독으로서의 정체성,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지만 스스로는 사진 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따로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를 열며 박 감독은 “예명을 써볼까도 생각했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화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제 사진을 사전 정보 없이 보여드리면 영화와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겠지만, 내면의 생각은 언제나 영화가 공존해 왔기에 다르면서도 연결돼 있는 두 세계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냥 제 이름을 쓰기로 했습니다.”
전시의 제목은 ‘너의 표정(Your Faces)’이다. 박 감독은 “표정은 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이지만 주변을 관찰하고 모든 사물, 풍경과 교감하고 그것들의 표정을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지어봤다”고 말했다. ‘너의 표정’에서 선보이는 사진 30여 점은 영화 ‘스토커’(2013) 촬영 당시인 2012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에 찍었다.
사진의 비범함은 영화감독 박찬욱과 결을 같이 한다. 색감의 대비, 조명(빛)의 활용, 질감의 표현이 영화보다 친절하게 보여졌고, 전시 곳곳에선 취향이 발현됐다.
무채색 바탕과 대비되는 알록달록한 색이 담긴 발리의 공물 조각(Face 205). 그는 “특히 좋아하는 요소”라며 “어찌 보면 내 영화의 룩(LOOK)과도 닮은 면이 있다”고 했다. “전시를 하는데 고양이 한 마리 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찍은 고양이 사진(Face 89)과 계조가 풍부하게 표현된 바위(Face 45)는 질감의 섬세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질감을 표현해봤어요. 영화를 만들 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에요. 소품이든지 의상이든지, 질감이 느껴지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요. 영화는 눈과 귀로 감상하지만, 질감이 잘 구현될 때에는 손끝에서 만져질 것 같은 느낌을 느끼거나, 냄새가 날 것 같을 때도 있어요. 또 다른 감각기관을 자극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려 하죠.”
박 감독의 사진은 그것 하나로 ‘완결된 이야기’이면서도 이전과 이후를 상상하게 한다. 그의 사진이 한 권의 책이라면 절정으로 치닫기 전의 이야기이고, 계절이라면 꽃이 만발하기 전의 시점인 초봄이나 겨울이다. 고요한 분위기에서도 때때로 생동감이 튀어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 작업을 할 때도 배우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 혼자 준비하거나, 생각하거나 감정을 끌어올리는 그 순간의 흔적을 담아요. 영화에서 본격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기 직전의 순간을 담는 것처럼 사진에서도 그런 순간들을 나타내는 거죠.” 지극한 찰나, “1000분의 1초”에 따라 달라지는 순간은 크로아티아의 하늘(Face 53)에서 발견했다. “다른 차원의 구멍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웜홀”처럼 무한한 상상의 대상이 됐다.
‘너의 표정’은 평범한 순간들을 담았다. 보기에 따라 깜짝 놀랄 만한 비경( 境)은 없다. 시선을 두지 않는 사물, 스쳐 지나도 무관한 상황, 딱히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들도 사각 프레임 안에서 주연이 된다. 영화 ‘아가씨’가 “추악한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과 다르지 않다. 메마른 벌판 위에 외로이 선 앙상한 고목(Face 183)을 통해선 “아주 볼품없는 나무 관목이 갑자기 조명을 받고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담았다. 그는 “누군가는 접어놓은 방수포가 전혀 아름답지 않다고 하지만, 포인트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관객이 볼 땐 제 영화나 사진이나 거기서 거기일 거예요. 저라는 창작자의 속성 때문이죠. 다만 사진은 시간적인 표현의 한계가 있고, 공간적으로도 정해진 프레임에 표현해내야 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영화보다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해요. 사물과 저만의 1대 1 대화, 사적인 대화의 순간들을 만나며 관객들도 각자의 시간 속에서 이 사진들과 대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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