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간 블링컨, 마크롱 달래기.. 美·佛 앙금 여전

김태훈 2021. 10. 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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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컨, 마크롱과 독대에서 오해 풀기 시도
오커스에 뿔난 프랑스, 미국에 불신 드러내
마크롱 "유럽만의 군대로 EU 안보 지켜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OECD 각료이사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파리=AP연합뉴스
미국·영국·호주의 3국 안보 동맹 ‘오커스’(AUKUS) 출범으로 미국 등에 단단히 뿔이 난 프랑스를 달래기 위해 미국이 외교력을 기울이고 나섰다. 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동맹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으며 뾰로통한 표정이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 시대처럼 “프랑스가 미국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안보 리더십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5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이날 개막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참석차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엘리제궁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났다. 블링컨 장관은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마크롱 대통령은 영어가 유창해 두 사람은 통역 없이 약 40분 동안 독대했다.

다만 회담 후 외부에 알려진 내용엔 특별한 게 없었다.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처리해야 할 어려운 일들이 산적해 있다”며 “다만 이번 대화는 협력을 강화하고 심화할 기회가 됐으며, 매우 생산적이었다”고 말했다. 엘리제궁 역시 마크롱 대통령과 블링컨 장관의 만남이 “프랑스와 미국 사이 신뢰 회복에 기여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어려운 일이 산적해 있다’는 취지의 미국 측 언급이나 양국 간 신뢰 회복을 미래 과제로 돌린 프랑스 측 언급으로 미뤄볼 때 둘의 만남에서 오커스로 인한 두 나라 갈등을 조기에 봉합할 묘안은 도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책임질 새로운 동맹으로 미국·영국·호주 3국이 참여하는 오커스 창립을 선언했다. 핵심은 미국이 호주에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3국이 명시적으로 거론하진 않았으나 이는 남중국해 등 서태평양 일대에서 해군력을 증강하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6월 영국 콘월 G7 정상회의에서 만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문제는 호주가 핵잠수함 건조 기술을 미국에서 넘거받기로 하면서 기존에 프랑스로부터 재래식 잠수함을 구매하기로 한 계약이 파기됐다는 점이다. 우리 돈 약 77조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날리게 된 프랑스는 “동맹의 뒤통수를 때렸다”며 미국 등 3국을 맹비난했다. 돈도 돈이지만 향후 인도태평양 지역 정세를 좌우할 핵심 동맹체가 앵글로색슨 국가들로만 채워지고 프랑스는 배제됐다는 무력감 역시 프랑스를 자극한 원인 중 하나였다.

블링컨 장관과 회동을 마치고 같은 날 저녁 동유럽 슬로베니아로 이동한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연합(EU)·서부 발칸 정상회의 만찬에 참석했다. 그는 오커스에 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프랑스나 유럽에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고 답해 여전한 앙금을 드러냈다. 미국을 겨냥해 “우리는 지켜볼 것”이라고도 했다.

올해 초 바이든 정부가 출범하며 프랑스 등 동맹국들을 향해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쳤을 때만 해도 프랑스는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훼손된 양국 관계가 정상화됨은 물론 한 단계 더 상승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6월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주요7개국) 정상회의 때 마크롱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강한 애정을 표현한 바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슬로베니아 크란에서 열린 EU·서부 발칸 정상회의 만찬장으로 이동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크란=AP연합뉴스
하지만 오커스 출범을 계기로 프랑스는 결국 독자적 안보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는 모습이다. 시종일관 미국에 끌려다니다가 정작 오커스처럼 중요한 기구 결성에선 배제된 점을 교훈 삼아 ‘프랑스 안보는 프랑스가 지킨다’는 사고방식을 굳혀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 1960년대 미국과 갈등을 빚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한 드골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대목이다.

당장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영국이 주도하는 나토와 별개로 EU만의 독자적인 유럽군을 창설하는 구상에 박차를 가하고 나섰다. 유럽군이 생기는 경우 EU 회원국 중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인 프랑스가 이를 주도할 것이 뻔하다. 프랑스는 EU 회원 가운데 유일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최근 마크롱 대통령은 EU 회원국 지도자들을 향해 “우리가 진정한 유럽의 군대를 갖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유럽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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