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아닌 사진작가 박찬욱..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조명"

장재선 기자 2021. 10. 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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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작가가 작품 ‘Face 183’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볼품없는 나무 관목이 사진 조명을 받고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가 아끼는 라이카 모노크롬.
박찬욱, ‘Face 16’.

■ 부산서 첫 개인전 ‘너의 표정’

대학 신입생시절 사진부터 배워

영화하면서도 카메라 메면 숨통

국내 포함 美·英 등 전세계 돌며

2012년부터 촬영한 30점 전시

영화 철저히 계산하고 만들지만

사진은 마구 다니며 ‘찰나’ 포착

스크린서 수많은 인물 다루기에

렌즈엔 사람 아닌 풍경·사물만

부산 = 글·사진 장재선 선임기자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지만, 저 스스로는 사진 찍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따로 갖고 있다고 느끼며 작업을 해왔습니다.”

영화감독 박찬욱(58)이 첫 사진 개인전 ‘너의 표정(Your Faces)’을 열고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지난 1일 개막해 12월 19일까지 진행한다. 지난 2012년부터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중 30점을 골라 선보인다. 이번에 동명의 사진집도 함께 나왔다.

개막일에 전시장에서 만난 박찬욱은 “오늘만큼은 사진하는 사람으로 왔다”고 했다. 세계에 한국 영화의 미학을 알린 ‘칸느박’이 아니라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여행지, 사무실, 집에서 꾸준히 사진을 찍어온 작가로 봐 달라는 당부였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인 동생 박찬경(56) 작가에 이어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가 됐다.

그는 개인전을 처음 열지만, ‘오! 라이카, 오프 더 사진전’ 등 그룹전엔 수차례 참여했다. 박찬경 작가와 함께 만든 프로젝트 그룹 파킹찬스(PARKing CHANce)로 광주에서 사진전을 연 적도 있다. 서울 용산 CGV 아트하우스에 있는 박찬욱관 입구에서는 ‘범신론’이라는 제목으로 넉 달에 한 번씩 그의 사진 여섯 점을 교체 전시하고 있다.

“영화 공부를 하기 전 사진부터 시작했어요. 대학 신입생 때부터 동아리에서 열심히 배우고 찍었거든요.”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추억을 되돌아봤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구도에 신경을 썼는데, 그게 자신의 예술에 영향을 미친 듯싶다고 했다.

“저는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은 사람인데, 영화를 만들고 알리는 작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여행하며 호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생활이 힘들고 지치는데요, 사진을 더 열심히 찍는 것은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어떻게든 즐겨보려는, 보람을 느껴보려는 그런 몸부림입니다. 어느 도시를 가면 주최 측에 하루 정도 시간을 빼달라고 해서 혼자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거죠.”

유명 감독의 꽉 짜인 일정에서 숨 쉴 수 있는 자유의 통로 역할을 사진이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여럿이 함께한다는 점이 행복하지만, 손발이 안 맞을 때는 한없이 힘든 일이죠. 게다가 큰돈이 들잖아요. 몇 십 억, 몇 백 억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무서운 일이에요.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그는 영화 작업에서 철저히 계획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스로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디자인해서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사진은 정반대다. “그냥 카메라를 메고 이어폰을 통해 노래를 큰소리로 들으며 미친 듯이 걸어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서 막 두리번거리며 마주치는 그 찰나의 만남을 찍는 거지요.”

이번 전시는 그 만남이 세계 각 지역에서 두루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 등 한국인들이 흔히 가는 지역뿐만 아니라 모로코, 인도네시아, 크로아티아 등의 도시를 고샅고샅 살핀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외할머니의 묘지, 겨울 들녘의 허수아비, 변산반도의 암벽 등 한국의 풍경도 있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촬영 과정을 설명하며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중요한 것처럼 부각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저 풀 위에 놓여 있던 돌이 사진을 통해 무덤의 상석이나 고인돌처럼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사진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수많은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사진에선 그 외의 피사체를 담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웜홀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모습의 하늘 등 자연 풍광 혹은 영화 홍보를 위한 GV 중 쉬고 싶을 때 만났던 가죽 의자처럼 무생물이 주인공이다.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해 질 무렵 산책하다가 발견한 파라솔들은 하얀 유령들이 검은 눈을 한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한 셈이다. “모든 사물, 풍경과 교감하며 그들의 표정을 발견하고 1대 1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사진전 제목을 ‘너의 표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스피리추얼(Spiritual)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했으나, 사진 작품들은 우주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Pantheism)’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촬영 후 후보정을 최대한 자제한다는 그가 또 하나 강조한 것은 “사진은 상상의 폭이 크다”는 것이다. 동영상에 비해 시간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는데, 그래서 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람객이 자신의 사진을 다양하게 해석하며 즐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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