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돌 한글날, 신미대사 업적을 제대로 기리자

- 2021. 10. 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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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이세 문화원 이사장·서울 남산 월명사 주지 월명
신미대사 업적을 제대로 기리자

거의 모든 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기둥마다 새겨 놓은 한문 주련 글씨이다. 당연히 어설픈 한자 지식으로는 번역이 안 되는 글귀들이다. 이런 글귀를 볼 때마다 떠오른 분이 있다. 바로 세종과 세조를 도와 한글 보급에 매우 큰 공로를 남기신 신미대사이다. 쉬운 문자로 중생을 계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신미대사의 뜻을 잇는 절이 왜 이리도 적은가.

부처님이나 세종대왕이나 신미대사나 문자에 대한 생각은 한결같이 같았을 것이다. 어려운 문자와 글로 불법을 가까이할 수 없거나 소통할 수 없는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세종과 신미대사 뜻대로 불교가 훈민정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불교는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계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불교 억압 정책을 폈던 양반 사대부의 문자 한문 불경을 더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 수많은 언해 불경, 한글 불경이 있어 한글이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하는데 큰 구실을 했다.

신미대사를 한글 창제 공로자가 아니라 반포 공로자로만 보는 시각을 마뜩잖게 바라보거나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다. 창제는 1443년 반포는 1446년, 실제 백성들한테 알려진 것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불경책을 통해서이니 이 책이 나온 것은 1449년이다 보니 이런 논란이 생겼다. 신미대사의 한글 공로를 기리는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수행한 한글학자로서 신미스님을 반포 공로자로 기리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창제 공로자 견해들은 객관적 추론이라 기보다 상상에 가깝다. 반포 공로자만으로 기려도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굳이 상상을 통해 논란을 만들면 오히려 신미대사께 누가 된다.

575돌 한글날은 훈민정음(한글)을 백성들한테 알린 반포를 기리는 날이다. 세종대왕은 1443년 훈민정음 창제를 마무리했지만, 그것을 백성들의 문자로 쓰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포는 새 문자의 취지와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한 해례본이 완성 ᆞ반포되기까지 대략 2년 9개월을 더 끌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창제와 반포의 차이가 있다 보니 그런 논란이 생겼다.

필자는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역락)에서 신미대사의 객관적으로 드러난 주요 공적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불경 언해 업적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불경언해서만 하더라도 “능엄경(언해), 원각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선종영가집(언해), 사법어(언해)” 등이 있다. 신미가 훈민정음에 매우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한문 불경은 인도에서 건너온 산스크리트 불경에 기초한 것이고 한문 불경을 소리 문자로 옮기기 위해서는 한문 불경에서 참고한 산스크리트불경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대진언 등 산스크리트와 한문과 함께 적힌 문헌도 있다. 월인석보 서문에서 자문해 준 첫 번째 인사로 신미대사를 들었고 뒤이어 “서천(西天) 글자(산스크리트문자)로 만든 경전이 높이 쌓여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독송하려면 오히려 어렵게 여겨서 우리나라 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하노니 사람마다 듣고 얻어서 읽고 외워 우러러 존중하기를 앙망하노라.”로 보아 불경 언해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 식견이 있는 스님이 중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신미대사가 실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는지 공식 기록은 없지만 위와 같은 월인석보 서문이 간접 증거가 된다.

둘째, 신미는 최초로 언문으로 국가 기관에 상소문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파격적인 언문 역사의 주인공이다. 예종 1년(1469) 6월 27일에 신미 대사가 비밀 언문 상소를 올렸다(예종실록). 이는 상소문 내용에 대한 평가를 떠나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의 언문 상소가 전무한 터에 대단히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신미는 나라에서 『금강경』과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여 스님 억제 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중으로서 경전을 외는 자는 간혹 있으나, 만약에 외워 강의하게 하면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겨우 한둘뿐일 것이니, 원컨대 다만 외는 것만으로 시험 하게 하소서.”라고 시험 수준을 낮춰달라고 상소하였다. 관련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이런 상소가 올라가자 예종이 신미를 광평 대군 옛집에 연금시켰다는 기사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아 신미대사의 훈민정음에 대한 열정과 실력, 이를 바탕으로 세종과 세조를 도와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큰 역할을 했고 그에 걸맞은 업적을 남긴 매우 훌륭한 훈민정음 보급 공로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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