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선수 김희진 "머리 스타일요? 지금 2021년이잖아요"

박다해 기자 2021. 10. 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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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세계가 사랑한 3대 '진' 김희진 여자배구 국가대표 선수 인터뷰

수술 이후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한쪽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코트에 들어서면 있는 힘껏 강스파이크를 때린다. 유난히 ‘쇼트커트’가 잘 어울려 ‘잘생겼다’ ‘멋지다’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지만 국가대표팀 언니들에겐 영락없이 귀여움을 받는다. 도쿄올림픽 여자배구팀의 ‘라이트’(공격) 포지션을 맡아 4강 신화를 이룬 김희진(30·IBK기업은행 알토스·사진) 선수 얘기다. <한겨레21>은 9월7일과 29일 두 번에 걸쳐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민소매 유니폼, 누가 탁 터트리면 좋겠어요

2021년 7∼8월, 2020 도쿄올림픽에서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온라인에선 여성 팬들의 애정 어린 댓글이 쇄도했다. “멋있으면 다 언니”니까, 이 ‘언니’의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 “과거 경기 영상까지 부지런히 찾아보고 또 보는 수고로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몸이 성한 선수가 없던 팀에서 협업해 전력을 짜내고, 코트 안에 힘을 불어넣으려 포효하기도 했다가, 수시로 서로를 토닥이며 격려하는 모습에 배구의 매력에 비로소 눈뜬 이도 여럿이다. 여자배구팀이 훌륭한 성적을 내는데도 다른 남성 구기종목에 견줘 제대로 중계되지 않는 데 대한 분노를 표하는 팬들도 있었다.

김희진을 만나기 전, 과거 주요 스포츠채널에서 진행한 그의 인터뷰를 여럿 찾아봤다. 이상한 공통점이 있었다. 거의 모든 인터뷰마다 진행자가 “머리 길러볼 생각 없냐”고 물었던 것이다. ‘왜 좀더 여성스러운 스타일링을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묻어나는 질문이다. 정작 김희진은 씨익 웃으며 반문한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머리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 여성스럽고 남성스러운 게 뭔지도 모르겠고요. 머리 긴 남자한테 머리 길다고 (뭐라) 하진 않잖아요?”(웃음)

사실 그는 머리카락을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징크스가 생기는 것만 같아서 처음 짧게 잘랐다고 한다. 경기력에 영향을 덜 미치고 싶었다. “예전엔 밖에서 화장실 갈 때 (누군가 쳐다보면) ‘여자예요’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지금 2021년이잖아요’ 이렇게 답해요.” 익숙한 경험인 듯 가볍게 털어놨지만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기왕 묻는 것, 궁금증을 좀더 풀어보기로 했다. 늘 배구 경기를 보며 품은 의문점, “왜 여성 선수만 민소매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짧은 바지를 입는지 의아하다”고 물었다. 여지없이 꽉 찬 돌직구 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맞아요. 민소매 유니폼은 (선수가) 더 위축되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요. 공격할 때 불편하기도 하고요.” 그는 맞장구를 친다. “어느 팀이 (유니폼 변화를) 탁 터트리면 좋겠어요.”(웃음) 2020년 한국배구연맹(KOVO)은 ‘(하의) 허리와 길이는 타이트해야 하며 몸선에 맞아야 한다’는 여성 선수 유니폼 규정을 남녀 구분 없이 ‘허리와 길이는 헐렁하거나 느슨하지 않게 몸에 잘 맞아야 한다’로 개정했다. 배구 팬들이 성차별적이라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경기장에서 큰 변화는 없었다.

첫 수술 그리고 아프지만 물러서지 않은 이유

김희진의 ‘인생 롤모델’은 박세리 선수다. 여성 스포츠계에서 필요한 목소리를 많이 내준다고 생각해서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도 많이 알아주시잖아요. 모든 스포츠인을 존중해주는 느낌도 있고요.” 올림픽을 거치며 여성 운동선수와 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것 같다고 말하자 “<노는 언니>(E채널) 프로그램의 역할이 특히 크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세리 선수를 포함해 다양한 종목의 여성 선수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노는 언니> 덕에 여성 선수들이 좀더 대중에게 알려지고 관심도 받고, 또 열심히 운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올림픽 때도 선수들이 어떻게 노력했는지, 그 과정에 더 공감해주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번 올림픽 때는 모든 종목이 행복한 응원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필요한 말을 하는’ 소신, 선후배·동료를 살뜰히 챙긴다는 점에선 그도 박세리 선수와 닮아 있다. 지난 8월 김희진은 2016년부터 수년간 무분별한 명예훼손과 협박, 스토킹 등에 시달렸다며 악플 가해자들을 형사고소했다. “사실 (고소는) 작정하고 한 것도 있어요. 소속사가 따로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한 건데, 선수 개인도 이렇게 대응할 수 있다고 선후배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었거든요. 운동선수는 실력으로 보여주는 사람이기에 부진하면 비판받을 순 있어요. 하지만 가족을 거론하거나 (여성 선수라고) 성적인 내용의 악플을 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쿄올림픽은 김희진에게 세 번째 올림픽 도전이었다. 출전 불과 두 달 전인 2021년 5월, 그는 오른쪽 무릎 뼛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그는 “(올림픽 기간 동안) 팀원들에게 제 몸과 짐을 하나씩 나눠 지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면서도 “‘원팀’으로 뭉치면 무서울 게 없고 해볼 만하구나” 싶었다고 한다. 우울감에 빠지려 할 때마다 룸메이트 염혜선 선수가 붙들어줬고, 팀을 우선 생각하는 주장 김연경 선수도 있었다. “아프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던” 이유다.

‘원팀’의 기적 같은 승리는 이렇게 모두가 서로의 짐을 나누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팀 스포츠니까 여러 사람이 합심해서 싸우잖아요. 단결력, 단합력도 중요하고 여러 명이 파이팅하니 역동적인 결과물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함께 흘리는 땀의 매력이고, 강점이다.

부상한 이후 얻은 ‘해탈한 마음’

V리그에는 이번 시즌부터 신생 구단 ‘AI 페퍼스’가 합류한다. 그 덕에 경기 수가 늘었다. 목표는 늘 우승, 그리고 부상 없이 끝까지 시합을 뛰는 일이다. 매번 치열한 승부를 맞닥뜨려야 하는데, 특별한 멘털 관리법은 없을까. 김희진이 밝힌 비기는 바로 ‘나’의 중심을 잡는 것. “제 마음이 힘들어지니 남과 비교는 잘 안 하려 노력해요. 대신 수많은 연습, 경기, 실력으로 보여준 날을 돌이키며 저 자신을 믿으려 하죠.” 그는 부상 이후 어느 정도 ‘해탈한 마음’을 얻게 됐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올림픽 이후, 몰려드는 인터뷰와 각종 방송·화보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다. 즐거움을 한껏 만끽할 법한데 김희진은 다음을 생각한다. “제대로 된 세대교체가 시작되는 시점이니까요.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해야죠.” 후배 선수들에게 “잔소리는 안 한다”면서도 “코트에서 좀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감을 많이 심어주는 편”이다.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같이 분석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김연경·김수지·양효진 등 최고참 선수들이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상황에서 김희진은 앞으로 국가대표팀의 ‘기둥’ 역할을 해야만 한다. 혹여 부담이 되지 않을까. “최고참이란 타이틀을 버리고, 똑같은 선수로 코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본분이라 생각해요.” 담담하면서도 야무진 답변이다. “세계가 사랑한 3대 ‘진’은 ‘이매진, 빌리진, 김희진’”이란 팬들의 ‘주접’ 댓글에 일견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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