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희수에게, 세상 어디에 있을 또 다른 희수에게

2021. 10.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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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수 전역 취소 1심 선고를 앞두고] 연속 기고 ⑤

[희수 친구 김선하]
4월 15일, 5월 13일, 7월 1일, 8월 19일. 4차례 서울에서 대전으로 버스가 향했습니다. 지난 3월 3일 세상을 떠난 故 변희수 하사의 복직을 위한 소송의 변론기일에 시민들이 참여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정된 방청석에 서울에서 내려온 시민 여럿이 앉지 못할 정도로 재판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습니다.

저 또한 두 차례 재판을 방청하며 군사당국의 폭력과 야만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국제적 민주화 운동에 연대하는 단체 '세계시민선언'은 국방부의 변희수 하사 전역 처분을 국가폭력으로 보고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별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치료적 목적의 수술을 진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방부는 변 하사의 직업선택의 자유권을 비롯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생존권을 박탈했습니다.

변 하사에 대한 전역처분은 또한 변 하사 개인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군 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혹은 직업군인의 꿈을 가진 모든 성소수자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폭력입니다.

오는 10월 7일 전역처분 소송 1차 선고를 앞두고 재판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이 △故 변희수 하사를 추억하고 △재판이 어떻게 전개돼 나갔는지 말하며 △1차 선고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한 연속 기고에 나섭니다. 편집자(이설아 세계시민선언 공동대표)

ⓒ연합뉴스

희수가 떠나고 내 일상에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희수의 이름을 검색해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청승맞다고 생각하겠지만 매일 밤 희수 이름을 검색하고 사람들이 희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하나 다 찾아보고는 마음이 답답해서 운다. 학교에서는 친구를 떠나보내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나 속상하다.

아직도 희수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친구 2명과의 카카오톡 그룹채팅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희수 생일에는 그룹채팅방에서 시간이 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영상통화를 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 재밌었던 추억도 공유하고 울기도 하고 다음 희수 생일에는 희수를 만나러 청주에 가겠다는 다짐도 나눴다. 

이상하게 잘해준 기억, 재밌던 기억보다는 못 해준 것만 생각난다. 같이 엔딩을 보기로 했던 게임을 끝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나를 슬프게 만든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 같지만 늘 가슴 한 곳에 희수가 남아있다.

각종 뉴스와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보이는 희수의 전역 처분 취소 청구 소송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희수가 떠나고 희수의 부모님께서 전역 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이어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희수가 처음 기자회견을 한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언론과 많은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희수 부모님도 그런 상황을 겪으실까 봐 걱정이 됐다. 처음에는 무조건 비난하는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응원글도 많이 보여 안심이 됐다.

안심이 되는 와중에도 나는 희수가 겪어야만 했던 이 모든 상황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군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면서까지 내가 군인이 되고 싶었다는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조차 화가 났다. 

내 친구 변희수는 다른 사람들은 안 갈 수 있다면 절대 가지 않을 군대를 직접 부사관으로 지원하여 입대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군생활을 했고 애국심이 강한 군인이었는데, 대한민국 육군은 그런 군인을 이렇게 떠나 보낸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소송을 지켜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에 좌절했었다. '내가 유명했더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를 내기 쉬웠을 텐데,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많았을 텐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온라인 탄원서 양식을 보자마자 바로 작성해서 제출했다. 사람들의 인식만 바꿀 수 있다면,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해소가 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방송국 인터뷰도 했다. 그런데도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계속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간간이 들려오는 소송 소식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처음부터 희수가 군생활을 힘들어하고 군복무에 부적합했다는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육군의 주장도 들었다. 군특성화 고등학교를 다녔던 내 동기의 대다수는 군인이 됐다. 물론 그 중에는 군생활이 힘들다며 우울해 하고 전역날만 기다리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희수는 그런 친구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즐거워하고 나에게 군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나도 그런 희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얘는 정말 군인 아니었으면 뭐가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만큼 본인의 군생활에 만족하고, 또 이어나가고 싶어하던 그런 군인이었다. 그런 희수의 열정과 애국심마저 무시해버리는 듯한 군의 주장에 너무 속상했다.

이번 소송 기간 동안 많이 울고 많이 후회하고 많이 분노했지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사실 희수가 나에게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나는 내 주위에 성소수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소수자도 나와 다른 점 하나 없는 그냥 사람이었다. 일상의 많은 곳에 성소수자들이 있다. 우리 곁에도 있다. 

이들이 차별과 혐오와 싸우고 있다. 이번 소송을 통해 희수와 희수의 부모님이 명예를 되찾기를 바란다. 더하여 세상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희수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며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희수 친구 김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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