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런웨이』 윤고은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걸어갈 때 손잡고 가는 것"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1. 10. 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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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귀찮아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많잖아. 결혼이라는 큰 문제를 보험을 통해 접근한다면, 결혼이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면…. 보험 상품을 통해 결혼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신다운 발상 같아 보였다. 두어 개의 이야기가 만나 꼬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즐기는.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에선, 여행과 재난을 떨어뜨려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여행과 재난을 대놓고 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 아니었던가.

오래 전, 그는 ‘결혼보험’을 생각했다. 계약서나 각서, 보험 약관집, 책 속의 책 등의 형식에 흥미를 갖고 있던 그였다. 왜냐하면 빼도박도 못하는 조항이나 조문으로 이뤄진 보험 약관집 등에는 그 시대의 삶이나 일상 등이 절묘하게 담겨 있으니까.

“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택사항인데, 보험에 들 때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떤 가능성, 미래를 보고 가입하게 되잖아요. 이게 이야기적으로, 소설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요.”

『밤의 여행자들』에도 여행자를 위한 보험에 재밌는 조항들이 나온다. 고객 사망 시에만 환불된다, 는 끔직한 ‘미래형의 약속’들이 깨알 같은 글씨 안에 들어가 있는데도, 계약 당시에는 그렇게 될 가능성을 모르거나 설마, 하며 놓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올해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수여하는 ‘대거상 번역 추리소설상’을 거머쥔 윤고은 작가의 신작 장편 『도서관 런웨이』(현대문학)는, 현대의 사랑과 결혼을 보험 상품을 통해 발칙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결혼과 보험을 결합해 펼쳐 보이는 이야기라니.

도서관에서 런웨이하는 모습을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올리는 여행사 직원 출신 안나는 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서 책으로 둔갑한 결혼보험 약관집을 발견한다. 안나는 약관집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거액에 팔린다는 걸 대학 친구 유리에게 알려준 뒤 홀연히 사라진다.

보험사 직원 출신인 친구 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약관집과 함께 안나를 찾아 나선다. 안나의 남편 정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리는 약관집을 찾은 뒤 보험사 언더라이터 조를 만나면서 애상치 못한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데.

그의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영국 추리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윤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의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단어와 문장, 사유마다 재기와 발랄을 덕지덕지 붙인 그의 만연체 말들은 귀에 와서 박힌 뒤 뇌의 전하수체로 신호를 다급하게 보내곤 했다. 웃으라고, 또 웃으라고.

―소설은 도서관 책 사이로 걷는 안나의 모습에서 시작해 다시 안나의 모습으로 끝나는데.

“소설을 시작하게 된 지점은 도서관에서 걸어가는 인물의 이미지, 책들이 작은 사이즈로 꽂혀 있을 때 그 앞을 걸어가는 이미지였다. 안나라는 인물이 등장해 책 사이를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다시 드물게 걷게 된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이번 소설에선 조용해야 하는 도서관과 런웨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붙여 상상했다. 도서관은 정숙해야 하는 공간인데, 도서관에 가득 꽂혀있는 책들은 수많은 인생과 말이 담긴 수다쟁이들이라는 것도 재밌다.”

―안나와 유리, ‘조’와 정우라는 흥미로운 네 인물이 등장한다.

“저는 특정 인물을 모델로 하지 않고, 대체로 만들어간다. 제 모습도 조금씩 들어가고. 유리는 안나와 다르게 차분하게 진실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조’라는 인물은 안나의 생활을 알고 싶어서 자격이 되지 않는 정우의 보험을 가입시켜준, 문제적 인물이다. 정우는 안나가 사랑하는 인물 정도로만 나오고 면모가 잘 나오지 않는다. 조가 심사하는 과정에서 서류상으로밖에 알 수 없고, 뒤늦게 안나의 추억 속에서 드문드문 알게 되는 사람이다.”

―사건 전개의 핵심은 결국 결혼보험 약관집인데, 어떤 의미인지.

“결혼은 예전에 비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큰일이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이기에 개인에게 엄청난 모험이다. 이 모험을 약간 덜 힘들도록 편하게 도와주고 하나하나 풀어서 얘기해야 하는 과정을 버튼 하나를 눌러 대신할 수 있다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커버해주는 보험회사가 등장한 것이다. 보험회사는 약관집에 모든 것을 명문화해 놓는다. 소설 안에는 2가지 형식의 약속이 있다. 하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놓고 다투는 보험 약관집이고, 또 하나는 명문화된 건 아니지만, 안나와 정우 사이에 약속하는 말들이다. 이를 통해 너무 다른 두 약속의 세계를 대비시키고 싶었다. 보험약관집의 세계는 디테일하게 따져서 돈이 오가는 세계이고, 약속의 말은, 책임을 물을 순 없지만, 안나가 남편과 했던 말들, 이미 사라져버린 사람의 말과 표정을 계속 곱씹고 믿고 싶은 대로 되뇌는 세계이다.”

소설 속의 결혼보험 약관집은 특이하다. 예를 들면, 양가에 오가는 예단예물이“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한 합리적인 소비”로 판정되면 ‘페이백’이 가능하지만, 사돈에게 받은 현금으로 ‘기분을 내기 위해’ 냉장고를 교체한 경우엔 “사치품으로 분류”돼 페이백이 불가능하다. 같은 주소 내에 머무는 가족의 생일 파티는 보장 대상이이만, 주소가 다르면 불가능하다. 개인 맞춤형으로, 약관집 앞 부문은 사례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가미돼 있다.

―실제 이렇게 결혼 생활을 커버하는 보험이 있는지.

“실제 세계에는 이런 결혼보험 상품은 없는 것 같다. 중국 등에선 결혼식 보험이나 결혼하면 축하금을 주는 보험 등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결혼보험 상품은 없다. 제가 창작한 것이다(웃음).”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밤의 여행자들』이 재난을 다룬 소설이라면, 『도서관 런웨이』는 재난과 재건을 다룬 소설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안나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휩쓸리고 즐겨하던 도서관 런웨이를 멈추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말을 반복해 떠올리면서 남편과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3인칭 이야기에 닿게 되니까. 소설 시작 부분에서는 안나가 걸었다면, 끝부분에선 안나의 이야기가 걷는 셈이다. 안나를 떠나서 아주 조금씩 이야기가 이동하는 것이다. 저는 이것들이 무너진 것을 하나하나 재건하고자 애쓰는 몸짓으로 느껴졌다. 어떤 이야기들은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한 보 앞으로 걸어 나가기도 하니까. 이를 통해 자기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을 때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추슬러 가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의 모습을. 걸어간다는 자체가, 속도건 보폭이건 상관없이, 이동하는 것이다. 아울러 부끄러움이나 상처, 비밀을 안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이 웅크리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도 그려주고 싶었다.”

소설 끝자락에는 천천히 이동하는 안나의 모습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도입부의 경쾌하고 재기발랄한 모습과 또다른, 한꺼풀의 경험치가 더 쌓여서 더 풍성해지고 더 너그러워진 듯한 안나가. 새로운 이야기를 웅건하게 품은 안나가.

“안나의 이야기는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걷고 있었다…안나는 그 황홀한 조우에 대해 말해주었다. 바닥을 보면 안나의 그림자와 거대한 나무의 그림자가 이미 꼭 붙어 있어서 서로의 실루엣을 무너뜨린 상태가 되어 있다고. 창밖에 바람이 불면 입사귀의 그림자들은 더 요란하게 흔들리고 그 요동 속에서 그와 안나는 키스를 한다고. 그림자는 실체보다 더 빨리 닿는 거라고.”(267-269쪽)

그리하며, 소설 안에는 모두 세 개의 이야기가 함께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우리가 읽고 있는 『도서관 런웨이』가, 다른 하나는 스토리텔링 효과로 도서관에 들어가 버린 결혼보험 약관집이, 마지막은 이제 겨우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한, 안나가 친구 유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한 사람이 말하지, 우리 그럼 눈이 녹기 전에 끌어안읍시다. 눈이 있는 동안만 가능한 것처럼 서둘러 끌어안읍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거야. 그럽시다.”(269쪽)라는.

“저는 안나가 친구 유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소 껄끄러웠던 두 사람이 이제 한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계가 된 것만으로도 그 둘 모두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아서요.”

―문체를 보면 자연스러우면서도 능청스럽고, 또 상당한 속도감이 있는 것 같다.

“저는 문장의 리듬감을 대개 중요시한다. 문장을 쓸 때 소리 내서 읽기도 한다. 속도감을 늦추고 싶을 때 의도적으로 고여 있게 하는 부문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빨리 가는 문장을 좋아한다. 이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쓴다.”

―이번 소설에서도 호기심이나 묘한 미스터리 같은 게 있는 듯한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해져야 저도 쓸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 독자가 호기심, 궁금증을 하나 이상 품고 그것을 따라가게 한다. 호기심과 궁금증 유발, 인물을 선택의 기로에 놓는 것을 좋아한다.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사건에 개입될 수도, 휘말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인물에게 잔인할 수 있지만, 예기치 않는 사건이 일어나서 어찌할 수 없이 휩쓸리기보다는 어느 정도 자기 선택으로 걸어가게 되는 지점들, 선택의 기점을 준다. 『도서관 런웨이』에서도 유리는 안나에게 남자뿐만 아니라 뭔가 불편한 느낌이 있어 안나의 일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지만 결국 휘말리게 된다. 불안하니까. 머리속에 솜사탕 같은 것이 있어 메모도 없고, 규격도 없이 쓴다(웃음).”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마지막 한 장이 넘어갈 때 한동안 멈춰 있던 계절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고, 이렇게 각별한 해동의 경험은 우리가 계속 쓰거나 읽도록 만든다”고 했는데.

“책을 쓰는 동안에는 중요하지 않는 문장, 소품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서 쓴다. 읽혀도 되고 읽히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데 이것을 따라오는 독자를 보면 무섭다 싶으면서도 재밌다. 소품들은 그 시기를 살면서 저에게 들어오는 것도 많다. 소설을 다 쓰고 나면 다음 작품으로 가기 전까지 해동감을 느낀다는 의미다. 이미 해동됐기 때문에 이 세계는 모르는 세계가 된다.”

문학 선생님은 내 이름을 알까, 내가 어떤 아이인지 알까, 하고 경기도 성남시 성일여고 2학년생 윤고은은 절급하게 궁금했다. 담임도 아닌 문학 선생님이, 반장도 아니고 공부도 아주 잘하지 않는 나를 알고 있을까.

“선생님, 소설을 쓴 것이 있는데 한번 봐 주실 수 있으세요?”

어느 날, 문학 수업이 끝나자 그는 복도로 달려가 문학 선생 앞에 섰다. 문학 선생은 소설가와 시인 등 작가를 예찬한 뒤 여러분 중에 쓰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 당시 그는 써둔 소설이 없었다. 선생이 봐준다고 하면 쓸 생각이었다.

다음 시간까지 가지고 오너라, 라고 문학 선생은 말했다.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그도 그럴 것이 일반고여서 소설 쓰는 학생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는 그날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3일 정도 썼을까.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 행성 교신하듯이, 무려 40대 후반 아저씨를, 그것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나’를 화자로 내세운.

“도입부가 시처럼 아름답네.”

원고를 받아갔던 문학 선생은 다음 수업이 끝난 뒤 복도에서 그에게 말해줬다. 도입부가 시처럼 아름답다고? 그가 대학에 입학한 뒤 소설을 다시 봤지만, 아무리 봐도 도입부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때의 과정은 그에게 기분 좋게 아로새겨졌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썼고, 자신이 만든 세계를 읽고 평을 해주는 과정이.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고은은 동국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2003년 「피어싱」으로 대산대학문학상을, 2008년 장편 『무중력 증후군』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차례로 수상하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의 세계와 작가의 길은 어떻게 들어왔는가.

“고교 시절 문예반을 하기도 하고 소설도 한 편 써봤지만, 소설가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국어국문 문예창작과를 가게 됐는데, 창작 수업을 하다가 소설과 시 쓰기가 과제여서 쓰게 됐다. 대학 2학년 때 두 번째 소설을 썼다. 문창과 교수가 길에서 캠프 간다고 하니까 한 마디 툭, 던졌다. 너 이 녀석, 지각만 하는 줄 알았는데, 소설은 재밌더라. 제가 만든 세계를 재밌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창작이 재밌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쓰게 됐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로 『무중력 증후군』(2008), 『밤의 여행자들』(2013), 『해적판을 타고』(2017)을, 소설집으로 『1인용 식탁』(2010), 『알로하』(2014),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2016),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2019)을 펴냈다. 특히 장편 『밤의 여행자들』은 지난해 영어로 번역 출간된 뒤 올해 7월‘대거상 번역 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온라인 시상식에 참가해 주세요.”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수여하는 대거상 시상식을 앞두고, 그는 출판사로부터 수상식 참가를 부탁하는 연락을 받았다. 올해 그의 장편 『밤의 여행자들』이 다른 5명의 후보작과 함께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시상식은 코로나19 때문에 2년째 영국 현지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개최 시각. 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 반이었다. 평소 그의 생활 패턴으론 깨어있을 시간이 아니었고, 더구나 다음날 라디오 방송도 진행해야 했다. 받을 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 거기다가 확률은 겨우 6분의 1이라니.

나중에 그냥 소식으로 들으면 안될까요, 라고 그는 처음 말했다. 출판사는 수상 소감만 문자로 달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부탁했다. 아무래도 참가하는 게 좋겠다고.

7월2일(한국시각) 새벽, 그는 오래 만에 서재에서 혼자 깨어 있었다. 마침 『도서관 런웨이』를 마감 중이던 터라 마감이나 하자며 버텼다. 뒤숭숭해서인지, 글도 잘 써지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컴퓨터의 줌에 접속했다. 해외 축구 보는 기분으로. 자신의 소설을 번역한 번역가 리지 뷸러(Lizzie Buehler)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줌으로 수상식에 접속하고 있었다.

진행자는 와인 잔을 들고 행사를 진행했다. 차례로 호명된 수상자들 역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잠옷이 아닌 평상복을 걸친 그도 물을 담은 잔을 하나 준비했고, 수상에 대비해 소감문도 미리 준비하긴 했다. 지금 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집중력도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윤고은!”시상식이 번역 추리소설 부문으로 넘어간 얼마 뒤 갑자기 그의 이름이 불리어 졌다. 작게 그를 보여주는 화면이 갑자기 커지면서 전체 화면으로 바뀌었다. 마이크를 켜야 하나, 하고 그는 순간 당황했다. 미리 준비해둔 수상소감문이 생각나지 않았고, 주섬주섬 즉흥적으로 말해야 했다. 그럼에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가는 웜홀에 접속하는 느낌’이었다.

―수상 전후 자신이 추리소설을 썼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응했는데.

“대거상을 받고 난 뒤 추리소설에 대한 질문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다. 저도 어리둥절했다. 이게 왜 추리소설인가. 번역가 뷸러에게 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답하기도 했다. 추리소설 장르를 잘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의식하고 썼던 것도 아니지만, 추리소설적으로 흘러가는 구조를 좋아했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하게 된다. 또 책이 쓰여진 시점은 2013년이고 번역된 시점은 2020년 코로나19 이후였다. 코로나19로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면서 여행과 재난을 건드린 주제가 추리소설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직 추리소설 공부를 하지 못했다. 한 번 맘 잡고 추리소설을 읽어봐야지, 하고 20개 리스트를 뽑았다가 다 읽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조금 소개해 달라.

“저의 소설이, 작품이 산뜻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약간 무서운, 거대한 주제인데도 산뜻하게 전달하고 싶다. 굉장히 무서울 수 있는 산뜻함 같은. 『밤의 여행자들』의 경우 재난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산뜻할 수가 없는데 여행과 재난을 묶어 산뜻하게 하려 했고,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북한 문제를 아파트 문제로 풀려하거나 젊은 층의 집값 불안 이야기를 특이하게 풀어낸 것이었다. 『도서관 런웨이』 역시 결혼 제도의 본질은 사랑이고,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걸어갈 때 손잡고 가는 것인데, (결혼에) 너무 많은 것을 들어가서 사랑이 뒤로 쳐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과 사랑 문제를 산뜻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재미나고 특이하고 신선한 접근법으로 주제에 들어갈 문을 내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 구멍을 내서 들어가고 새로운 느낌을 가지고 나만의 풀이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평론가 염승숙씨는 윤고은 소설의 특징을 ‘재기발랄한 화술’과 ‘색다른 상상력’ 두 가지를 분석하더라.

“그럴 수 있다. 제 소설에는 많은 새로운 직업이나 산업이 나온다. 진부한 방식으로 쓰지 말고,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고 싶다. 시치미를 떼고 딴청을 부리는 것 같은데, 막 웃다가 알고 보면 네 이야기야, 어 내 얘기였어, 하며 풍자적이고 블랙 유머 같은 걸 좋아한다.”

―글을 쓸 때 특별한 리추얼 같은 게 있는지.

“급하면 지하철에서도 쓰고, 백화점 화장실에서도 쓰기도 한다. 급하면 장소에 상관없이 조각조각 쓴다. 소리도 상관 없다. 예열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조각조각 풀어가면서 쓴다. 다만 밤샘은 못한다. (장편소설은 어떤가) 장편을 쓸 때 한 번에 쭉 쓰고도 싶지만, 현실적으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출퇴근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잠깐 덮어놓고 다른 세계를 다녀오니까 머리가 식혀지고 환기가 돼서 그런지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다.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정서적으로 괜찮은 것 같다.”

―어떤 작가를 주로 읽고 공부하는지 궁금하다.

“저는 보통 한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면 그의 작품 전체를 읽는 전작주의다. 작가와 작품들은 제가 좋아하는 터널 같은 것이다. 일본 마루야마 겐지는 학생 때 좋아했지만, 통과하고 나서 그런지 지금은 낯설어졌다. 프랑스의 마르탱 파주(Martin Page)는 젊은 작가로,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나 표현 방식이 비슷해서 독자로 좋아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는 『황금방울새』와 『비밀의 계절』 등을 쓴 미국 작가 도나 타트(Donna L. Tartt)다. 궁금증을 품게 하고, 문장이 아름답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하는 등 제가 좋아하는 요소가 많다. 추리 소설을 쓰느냐 마느냐를 말하기는 애매하고 범죄가 발생하고 이것을 풀어가는 양식을 아는 바 없지만, 추리하고 싶은 주제를 추리하고 싶은 방향으로 건드리면서 속도감 있게 쓸 때, 도나 타트(의 방식이)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작가,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조금 욕심을 내자면, ‘전작을 읽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다. 그래서 어느 집 책장에 넓게 한 줄, 혹은 두 줄을 꽉꽉 채우는 작품을 쓰고 싶다. 그렇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제 소설 중에 단 한 권, 혹은 단 한 페이지, 단 한 줄이라도 어느 독자의 마음속을 일렁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 하고. 사랑은 그런 찰나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이왕 추리소설로 분류돼 대거상까지 받은 마당에, 앞으로 본격적으로 추리 소설을 쓰는 건 아닐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더니, 밝고 경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EBS 라디오를 켜면 들리는 그 목소리의. “사실 어떤 것이 본격적인 추리소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제 소설 안에서 추리소설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관심이 저로서도 재미있게 다가오고요. 전 제가 쓰고 싶은 방향으로 계속 쓸 뿐이지만요.”(2021.10.6)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 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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