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 교수와 문학은 1도 모르던 물리학도, 천재시인 이상의 비밀을 풀다
4차원 기하학 이용해 해석한
이수정 교수와 오상현 연구원
지난달 23일, 문학계와 과학계를 동시에 달군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바로 천재시인 이상의 난해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파헤친 논문이 발표됐다는 것이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수정 광주과학기술원(GIST) 기초교육학부교수와 오상현 미국 캘리포니아대 머세드 물리학 박사과정 연구원. 이들은 저널오브코리안컬쳐 54호에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연결, 그리고 차원 확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상 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삼차각 설계도’(1931)와 ‘건축무한육면각체’(1932)에 등장하는 일부 용어를 해석한 논문이다. 핵심은 시에 등장하는 ‘삼차각’이라는 조어가 4차원 공간상의 방향을 초구면좌표계로 나타낼 때에 쓰이는 세 개의 각도값을 의미한다고 본 것. 이를 통해 이상이 글로 4차원 시공간을 구현하려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수포자’였던 교수와 문학은 전혀 관심 없던 물리학도는 어떻게 해서 함께 100년 전 시인이 쓴 시의 비밀을 4차원 기하학을 통해 해석하게 됐을까? 이메일을 통해 이들을 만났다.
이수정 교수가 작년 1학기 개설한 ‘이상 문학과 과학’ 수업을 통해 연구가 이뤄지게 된 것으로 안다. 무엇을 배우는 수업이며, 어떻게 이번 연구로 나아갔나?
이수정(이하 이)=‘이상 문학과 과학’은 과학의 관점에서 이상의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과목이다. 이상 연구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미 수학과 물리학의 지식을 배경으로 이상의 초기시를 해석하거나 4차원 초입방체(hypercube)를 언급한 연구도 나와 있다. 이전 수업에서 삼차각을 ‘스테라디안(steradian, 입체각)’으로 추측한 학생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답답했는데 이번에 오상현 군이 3차원 입체각에 차원을 하나 더하자 모든 것이 정합적으로 설명됐다.
오상현(이하 오)= 「삼차각설계도」에는 상대론적 개념이 다수 등장하는데, 상대론적 공간은 4차원 시공간이기 때문에 ‘삼차각’과 ‘육면각’등의 조어를 해석하는 데에 4차원 기하학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 사실 ‘삼차각’의 의미에 대한 발상을 처음 떠올렸을 때는 ‘흥미로운 아이디어’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후 연구를 진행하면서 4차원 기하학에 연관된 다른 단서들, 즉 ‘육면각’과 차원 확장 장치 등을 발견하게 되면서 해석의 충분한 자기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에 등장하는 ‘사각의중의사각’ 표현을 기존에는 큰 사각형 안의 작은 사각형, 즉 2차원에서만 해석했다면 이를 3차원에서 해석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했다. 기존에는 왜 이러한 접근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이=새로운 해석이 가능했던 근본적인 이유로 작품 원문 검토를 꼽을 수 있다. 해당 시구는 일반적으로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으로 번역되는데, 이렇게 읽으면 자연스럽게 2차원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연구에서는“四角の中の四角(사각의중의사각)”이라고 쓰인 원문을 번역문과 함께 검토하였기에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이상이 입체를 평면으로, 또 평면을 입체로 변환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건축가였다는 사실을 계속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하였던 것도 주효했다. 그 밖에 언어유희와 시의 시각성의 측면에서 작품의 첫 두 줄에 사용된 한자 “중(中)”과 “원(圓)” 등의 사각형 모양에 주목하거나 특이한 띄어쓰기의 의미에 주목하는 등 면밀한 읽기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상은 작품 창작을 ‘독자와의 게임’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시 속에는 정교하게 설계하여 숨겨놓은 힌트가 있을 뿐, 의미 없이 쓴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①기존 해석에의 관성 ②언어와 번역의 장벽, 그리고 ③4차원 기하학의 개념적 장벽 때문이라 생각한다.
①경성의 백화점을 보고 썼다는 기존의 해석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으니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충분한 동기가 없었을 수 있다.
②‘사각형 중심 결합’ 해석을 뒷받침하는 단서 중 하나는 가운데 중(中)의 시각적 형상이다. 이는 사각형의 중심축을 보여주고, ‘四角の中の四角(사각의중의사각)’이라는 문구가 한 사각형이 다른 사각형의 중심축에 결합된 의미임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일본어 원문이 아닌 한국어 번역본에는 ‘사각의중의사각’이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등으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번역과정에서 원문의 힌트가 일부 소실되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제한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번역이라는 과정 자체에 내재된 어려움이다.
③ 만약 어떤 연구자가 ‘사각의중의사각’이라는 표현에서 ‘두 사각형이 삼차원 공간상에서 직교하는 모습’(2개 사각형 중심 결합)을 떠올렸더라도, 그러한 아이디어를 ‘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이라는 표현(4개 사각형 중심 결합)에까지 적용하기에는 4차원 기하학이라는 개념적 장벽이 존재한다. 그것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에 이공계적 접근과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사각형 중심 결합’이라는 아이디어의 출현을 늦춘 것이라 생각한다.
연구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이나 예상 못한 난관이 있었다면?
이=연구 과정은 즐거웠다. 다만 제1저자가 물리학 박사과정 학생이기 때문에 투고 가능한 저널을 찾는 일부터 쉽지는 않았다. 대부분 국문학 저널은 국문학 석사학위 이상 소유자를 투고자격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적인 내용과 수식으로 가득 찬 논문이 문학 저널의 심사를 통과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도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심사를 통과한 후 출판과정에서 편집을 위해 문서 형식을 바꾸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식이 모두 사라지고, 파일이 깨졌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나니 이상이 1930년대 신문과 잡지에 좌우가 바뀐 숫자와 도형을 사용하고 글자를 특정하게 배치한 작품을 발표하였던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다른 하나는 오픈 액세스(Open Access) 문제다. 논문을 계획할 때부터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오픈 액세스를 방침으로 삼았는데 이를 관철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했다.
오=시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 자체는 오히려 본업(물리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하며 논리를 문서화/체계화시키는 것, 그리고 물리학/수학에 관한 배경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저술하는 것은 즐거운 동시에 꽤 고된 작업이기는 했다.
오랫동안 천재 시인으로 불려왔던 이상의 진면목이 이번 연구를 통해 제대로 증명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의의가 무엇이라고 보나?
이=2차원으로 오인되어 온 이상의 초기시의 차원을 4차원으로 복원한 것이고, 이를 통해 초기시를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그동안 이상의 작품 중에서도 초기시는 매우 까다로워서 난해시로 도외시되어 왔다. 작품에 연구자의 해석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막강한 장벽이 쳐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이상의 초기시가 4차원 기하학을 활용한 시적 실험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장벽이 크게 약화되었고 돌파할 가능성이 열렸다.
전문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상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많은 국문학과 학생들이 이제 큰일났다고 하는 반응을 보이더라.
오= 바랐던 것보다 10배 이상 큰 관심을 받은 것 같다. 논문을 쉽게 쓰려고 노력하고, 소개 영상 등을 제작하여 배포한 것이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혹시 국문학과 여러분께서 이상 시의 기하학/물리학적 내용 때문에 골치가 아파지신다면, 웬만하면 저 말고 원작자인 이상 시인 탓을 해주시면 좋겠다(웃음).
이=이 논문은 국문학/물리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비전공자를 위하여 쓰였다. 소위 ‘수포자’였던 국문학자와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던’ 물리학도가 함께 작업하였기 때문에 비전공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웃음). 오 군은 학부 때 페임랩 코리아로 데뷔한 과학커뮤니케이터이기도 하다. 오 군이 직접 제작한 그림과 영상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 쓸쓸한 생애를 살았던 이상이 생전에 받아보지 못했던 대중의 이해와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기쁘다.
앞으로도 이런 문과와 이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복합 연구가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융합을 통해 창의적인 연구가 가능한데, 창의적이라는 말은 기존 시스템에 없다는 뜻이고, 이는 곧 처음 일어나는 상황들을 매끄럽게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또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듯이 제대로 된 융합연구를 하려면 단독으로 연구를 진행할 때보다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수고는 기꺼이 감내할 가치가 있다.
오=새롭고 창의적인 태도와 아이디어에 대해 우리가 더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가 기존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융복합 연구에 한한 이야기는 아니다. “틀을 벗어나서 생각하라(Think out of the box).”라는 말이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잠깐, 틀이라는 게 있었어(Wait, was there a box)?”라고 말할 만한 자유롭고 창의적인 태도가 더 확산되고 장려되길 바란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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