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에서 석탑까지.. 세종의 여민(與民) 정신 스민 길 [자박자박 소읍탐방]
여주 능서면 넓은 들판에 색깔 있는 벼로 그린 논바닥 그림이 있다. 세종대왕이 두 팔을 벌리고 호탕하게 웃음 짓는다. 여주 쌀 홍보 모델로 이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바로 옆 경강선 전철 역명은 세종대왕역이다. 주변 도로변에는 지명을 아예 ‘세종대왕면’으로 고치자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다. 능의 서쪽에 있어서 능서면이다. 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을 아울러 영녕릉이라고도 부른다. 이곳부터 여주 옛 도심을 거쳐 신륵사까지 이어지는 여주 여강길 4코스를 걷는다.
명당 찾아 여주까지… 최고의 왕을 모신 영릉
조선의 왕릉은 모두 42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를 계기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도 6년 2개월간 정비를 끝내고 지난해 한글날 다시 개방됐다. 예법에 맞지 않는 시설을 철거하고 세종대왕릉의 재실, 효종대왕릉의 연지 등을 원형에 가깝게 정비했다. 왕의 혼령이 이용하는 길이라는 향로(香路), 왕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지나가는 어로(御路)도 본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다고 한다.
왕릉 입구에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있다.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과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의 유물과 업적을 보여주는 공간이지만 코로나19로 현재는 문이 닫혔고, 카페 ‘여민락’도 영업을 중단했다. 능 관람에 나서기 전 마실 물 정도는 미리 챙기는 게 좋겠다.
역사문화관에서 능까지는 제법 걸어야 한다. 복원한 재실을 지나고, 깔끔하게 조성된 관람로를 따라가면 세종대왕 동상 아래에 일성정시의·앙구일부·자격루 등 당대의 발명품 모형이 세워져 있다. 다시 숲길을 따라가다 작은 연못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타난다. 이곳부터 진짜 왕릉이다. 뒤편으로 일직선의 향로와 어로가 길게 뻗어 있고, 좌우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다. 멋스러운 소나무 군락이 가장자리에서 호위하고 있다. 웅장하고 단아하다. 능으로는 바로 오르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가게 길이 나 있다. 능 가까이 가서도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알현하는 구조다.
세종대왕릉은 조선 왕릉 최초로 한 봉분에 두 개의 방을 갖춘 합장릉이다. 세종과 비 소헌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처음 능은 당시 광주(현 서울 내곡동)에 있었다고 한다. 소헌왕후가 먼저 승하하자 시아버지 태종의 무덤(헌릉)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성했다. 오른쪽 석실은 비워두었다가 세종이 승하한 후 합장했다.
세조 때부터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고, 사후 19년이 지난 1469년(예종 1) 이곳으로 천장했다. 풍수에 따르면 좌우 산자락이 청룡과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종대왕은 길지를 찾아 여주 땅에 잠들게 된 것이다.
대개 세종대왕릉만 보고 돌아서는데, 조금만 시간을 내 효종대왕릉까지 걸어보길 권한다. 세종대왕릉 오른편으로 길이 연결돼 있다. 1㎞ 남짓하지만 왕의 숲길을 만끽하기에 그만이다. 운치 있게 가지가 드리운 솔숲을 지나 낮은 언덕을 넘으면 그늘이 넉넉한 활엽수림이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해 제법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효종대왕릉은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무덤이 상하로 자리 잡은 쌍릉이다. 이러한 구조 역시 조선 왕릉 중 최초라고 한다. 세종대왕릉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정자각이고, 제법 가파른 산허리에 왕비와 왕의 능이 차례로 조성돼 있다. 빼곡한 숲에 둘러싸인 모양이 아담하고 아늑하다.
효종대왕릉도 구리 동구릉에서 옮겨 왔다. 처음에는 태조가 잠든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조성했다가 1673년(현종 14) 무덤에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제기돼 이곳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막상 능을 열어보니 실제로는 물이 든 흔적이 없어 천장에 연루된 자들이 면직을 당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외롭지 않고, 효종은 성군 곁에서 조명을 받게 됐으니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효종대왕릉에서는 왔던 길이 아니라 샛길을 통해 역사문화관으로 되돌아 나온다. 역시 왕의 기운이 가득한 울창한 숲길이다. 한글날이 코앞이다. 햇살 찬란한 가을, 성군의 뜻을 되새기는 두어 시간 나들이 코스로 딱 좋은 곳이다. 입장료 500원.
여강 언덕의 인생 길잡이, 신륵사 석탑
세종의 정신은 여주 전체를 관통한다. 여주 도심의 전통시장은 한글시장으로 명칭을 바꿨다. 상설시장이자 오일장(5·10일)이다. 골목 곳곳에 세종의 업적을 기리는 담장 그림이 그려져 있고, 디제이로 변신한 ‘힙한’ 임금님의 모습도 내걸렸다. 한글 상징탑 주변에는 어린 시절과 조선 4대 임금의 풍모를 담은 동상도 세웠다. 모두 백성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는 ‘여민락(與民樂)’의 뜻을 담은 조형물이다.
시청 인근에 대로사가 있다. 정조가 능에 참배하러 왔다가 지역 유림의 건의로 세운 송시열 사당이다. 정조가 직접 쓴 ‘대로사(大老祠)’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당 내부 초상화는 효종대왕릉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송시열은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다.
담장 너머는 남한강이다. 황포돛배가 그림처럼 오가던 강변에는 예부터 누정이 많았는데, 옛 여주 관아의 부속 건물인 청심루가 으뜸이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1945년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표석만 남아 있다. 대신 조금 떨어진 강 언덕에 영월루가 있다. 충주에서 양평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주 구간 남한강은 여름에는 황강, 겨울에는 여강으로 불렸다. 흙탕물이 제방을 위협하는 황강보다는 윤기 나는 검은 말갈기 빛깔을 띤 여강(驪江)이 아무래도 순하고 부드럽다. ‘여강의 한 굽이 산이 마치 그림 같아, 절반은 수채화 같고 절반은 시와 같네.’ 고려 말의 문신 이색이 ‘여강미회(驪江迷懷)’에서 처음 쓴 표현이라고 한다.
영월루에서 다리를 건너면 신륵사가 있다. 미륵의 힘으로 사나운 말의 기운을 제압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1472년(성종 3)에는 세종대왕릉의 원찰(궁중의 불당)로 삼아 보은사라고도 불렀다. 절간으로 들어서면 발길은 자연스럽게 강 언덕 암반에 홀연히 올라앉은 삼층석탑으로 향한다. 바로 위에는 중부지방에 흔치 않은 다층 전탑이 우뚝 솟아 있다. 안개 짙은 여강을 오르내리는 뱃사공에게 등대 같은 존재다. 한 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인생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세종의 여민(與民) 정신과 닮아 있다.
여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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