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입구 99번 출구로 오세요"

채민기 기자 입력 2021. 10. 6. 03:20 수정 2021. 10. 6.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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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 을지로체 연작 온라인 전시

무슨 글씨인지 언뜻 읽히지 않는다. 폰트(컴퓨터용 글꼴)가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이 가독성이라면 배달의민족 ‘을지로 오래오래체’는 자격 미달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간판 글씨처럼 풍화(風化)됐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8일 배포 예정인 이 폰트를 선보이는 ‘을지로입구 99번 출구’ 전시가 온라인(www.euljiro-exit99.com)에서 19일까지 열린다. 배달의민족이 2019년부터 진행해온 을지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전시다. 그해 배달의민족은 을지로 일대 간판 손글씨를 바탕으로 ‘을지로체’를 만들었고, 작년에는 시간이 지나 획이 조금씩 닳아버린 듯한 ‘을지로 10년후체’를 내놨다. 올해는 더 나아가 거의 지워지고 흔적만 남은 글씨를 통해 훌쩍 흘러버린 세월을 표현했다.

관객들이 을지로체 연작을 감상하기보다 체험하도록 전시를 꾸몄다. 예컨대 ‘을지로 말풍선 던지기’는 ‘캬’ ‘힛’ ‘뿡’ 같은 단음절이 을지로체로 적힌 풍선을 부풀려 던지는 코너다. 게임이라기엔 단순하지만 풍선이 터질 때의 경쾌한 파열음이 묘하게 중독적이다. ‘을지로 디제잉’은 일대에서 채집한 소리를 특정 자모마다 연결하고 관객이 임의의 문장을 입력하면 대응하는 사운드를 음악처럼 들려준다. 도시를 걸으며 예상치 못했던 장면을 만나듯 관객들이 콘텐츠와 조우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총 8개의 코너에 ‘해프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달의민족 폰트 '을지로체'의 바탕이 된 을지로 일대 간판 손글씨들. /배달의민족

작년, 재작년 전시에서 을지로 장인들을 조명했다면 올해는 을지로라는 공간에 주목한다. 을지로는 물리적 실체이면서 숱한 경험과 기억이 교차하는 정서적 공간이다. 각자가 떠올리는 을지로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 그래서 이 전시는 을지로다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실제 을지로의 특정 지역이 아닌 가상의 을지로를 배경으로 한다. 을지로입구 99번 출구라는 제목은 해리 포터의 ‘킹스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을 연상시킨다. 전시 첫 화면에서 관객에게 ‘코딩하는 미식가’나 ‘퇴근하는 사색가’ 따위의 이름을 무작위로 부여하는 것은 이 가상의 공간에 입장하는 의식에 해당한다.

배달의민족은 2012년부터 폰트를 무료 공개해 왔다. 마케팅 목적으로 폰트를 만드는 회사들이 늘었지만 본업이 아닌데도 10년씩 꾸준히 해온 곳은 드물다. 그간 내놓은 폰트엔 간판부터 화장실 안내판에 이르기까지, 도시 구석구석의 글씨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폰트를 만들고 배포하는 것은 그런 글씨에 얽힌 이야기를 되살리고 나누는 일이다. 배달 앱 회사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 늘 간단히 대답해 왔다고 한다. “재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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