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 대신, 다른 집 도련님처럼 대하기[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2021. 10.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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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아이가 스트레스 받을 때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8세 여자아이가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많단다. 엄마가 “옷 빨리 갈아입어”라고 해서 갈아입으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한 지 5초 만에 “너 빨리 갈아입으라고 했잖아! 왜 안 갈아입어?”라고 한단다. 매사 그렇다고 했다. 시켜놓고 하려고 하면 왜 아직 안 했냐고 혼낸단다. 한 번은 “왜 하려는데 혼내기만 해”라고 물어보니, 엄마는 “네가 만날 잘 안 하니까 그렇지”라고 했다. 아이는 굉장히 억울했다. 자기는 느릴 뿐이지, 한 번도 엄마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는 자신을 말 안 듣는 아이 취급했다.

아이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은 억울할 때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겁이 많은 어린아이가 너무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아빠를 쳤는데, 아빠가 “너 왜 이렇게 폭력적이야!”라고 하면 아이는 억울해서 스트레스가 생긴다. 또래들과 어울리며 결을 맞춰 조금 꾸몄을 뿐인데 부모가 “발랑 까졌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더니…” 하면서 날라리 취급하면 억울하다. 복도를 지나다가 실수로 어깨를 좀 쳤을 뿐인데 친구가 “왜 때려? 싸우자는 거야?”라고 오해하면 속상하다. 담임교사의 훈시 끝에 습관적으로 “아이 씨”라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담임교사가 “어디서 선생님한테 욕지거리야” 하면, 너무 억울하다.

특히 아이들은 공부랑 관련해 억울한 게 많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다고 성적이 꼭 잘 나오지는 않는다. 이때 교사나 부모가 “너 공부를 이렇게 안 해서 어쩌니?”라고 말하면 억울하다.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안 나왔으니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이’다. 그런데 필요한 도움은 못 줄망정 오해까지 하니 억울함은 배가된다. 이럴 때는 “정말 열심히 하던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속상하겠다. 우리 함께 이유를 좀 찾아볼까? 이왕이면 네가 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해서 아이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지켜보지도 않고 “너 요즘 공부 안 하지?”라고 넘겨짚는 것을 굉장히 억울해한다. 예를 들어 일주일째 출장 가 있는 아빠가 전화로 “너 요즘 공부 통 안 하지?”라고 말하면 서운하고 억울하다. 아이들은 “공부해”라는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가끔 공부를 정말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너는 너희 부모가 공부하라는 말을 하나도 안 했으면 좋겠니? 네 공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니?”라고 물어본다. 대부분 아니라고 한다.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공부와 관련해서 억울하고 답답하고 분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억울해하는 상황을 보면 부모가 과거 잘못으로 낙인을 찍어서 말하거나 지레짐작한 것에 대한 게 많다. 그 순간 그대로 아이를 봐주지 않는 것이다. 아이의 억울함이 덜하려면 부모는 늘 사건 하나하나를 독립된 사안으로 다뤄줘야 한다. 옛날에도 늘 그래왔다고 계속 그러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가끔 아닐 때도 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부모가 늘 그랬다고 하면서 야단치면 부모에 대한 신뢰가 뚝 떨어진다. 요즘 아이들의 또래 문화도 이해하고 인정해줘야 한다.

조금 더 어린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신의 안정감을 깨는 일에 불안해한다. 부모가 잘 돌봐 주지 않거나 싸움을 자주하거나 새롭고 낯선 경험을 갑자기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새로운 성장발달과제를 해야 할 때도 안정감 있던 전 단계가 깨진다. 부모가 사사건건 지적하는 상황에서도 정서적인 안정감이 깨진다. 예를 들어, 앉으면 “똑바로 앉아야지” 하고, 똑바로 앉으면 “허리 펴야지” 하고, 일어나면 “다시 앉아” 한다. 먹으면 “흘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하고, 안 먹으면 “왜 안 먹느냐?” 하고, 많이 먹으면 “왜 이렇게 많이 먹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고 살 수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스트레스는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지나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면 아이의 반응에 민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어려도 이 말을 했을 때 아이의 기분이 어떨지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를 오냐오냐 키우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이를 잠깐 맡아서 키워주는 귀한 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사사건건 쉽게 명령조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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