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자넨 아직도 사람을 믿나
[경향신문]
별다른 연고가 없는 한 무리의 인간. 출구 없이 펼쳐지는 죽음의 서바이벌. 이런 상황에서 필연코 일어나는 이전투구를 숨겨진 인간 본성의 통찰인 양 냉소하는 논리는 단조롭다. 동물계 포유강 영장목의 한 종일 뿐인 생물체가 위험 상황에서 자기 보호 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인간만의 비열한 특징이라기보다 자연법칙에 가깝다. 극단의 상황 논리로 인간의 잔혹성과 상호불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대척점엔 거울 논리라 할 만한 사례 역시 존재한다.
늘 상류사회를 동경하던 지인이 있었는데, 간절함에 우주가 도왔는지 부자와 결혼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욕구에 못 미치는 환경 때문이었을까. 늘 사회에 부정적이던 그이가, 결혼 후 갑자기 대한민국은 너무 좋은 나라라고 해서 놀랐었다. 부자들과 사귀어 보니 봉사 모임도 많고 예의 바른 이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계층 상승으로 하루아침에 세계관이 바뀌는 모습이 흥미롭긴 했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이상 성격자가 아닌 바에야 풍족한 사람들이 사교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극악한 모습을 보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잘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도 쉽다”거나 “부자니까 착한 거야”라는 유명 작품들의 인기 대사들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인간종의 도덕 본성 판단은 그리 간단치 않다.
기생충에 이어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화제다. 다양한 해석과 감상이 가능하겠지만, 내게 인상적인 상황은 두 가지다. 첫째는 데스게임을 거부하고 떠났던 이들 대부분이 결국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죽음의 공간에서 탈출해봤자 막막한 생계와 빚더미에 기댈 어깨도 없는 이들. 지옥이 이미 상수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456분의 455라는 사망확률보다 456분의 1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소중하다.
감옥이 인생의 대학이었다는 신영복 교수의 글이 떠올랐다. 이런 사람들이 왜 이곳에 있나 싶을 만큼 순박하고 징역생활도 모범적인 이들. 형기를 마치고 나가면 성실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감옥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인간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도덕’이란 기본적 생계와 돌봄의 온기가 갖추어진 토양에서 싹을 틔우는 고차원 생물체 같다.
두 번째 인상적인 부분은, 자신이 죽음의 경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각 인물들의 선택이다. 과반수가 합의하면 게임은 종료된다. 무차별 살상 공간치고는 깜짝 놀랄 만큼 민주적인 조건이다. 그럼에도 천문학적인 돈이 보이자, 그만두자는 이들만큼 지속하려는 이들도 나타난다. 인간성을 잃어가는 세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도 돈과 이권 앞에서 정신줄을 놓고, 부정직하고 위험한 인물들을 선출하는 소위 민주국가의 상황과 판박이다. 사회적 이슈마다 패러디물로 회자되는 나치 패망 영화 <몰락(down fall)>에서 히틀러의 수족이자 선전선동의 달인인 괴벨스는 궤변을 토한다. “난 국민들을 동정하지 않아. 우리는 강요한 적 없어. 그들이 스스로 위임한 거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수에 이끌려, 때로 ‘몰락’을 향해 내달을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슬픈 역설. 가끔 희망을 얻고 자주 무력해지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넨 아직도 사람을 믿나”하고 묻던 드라마 속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틀렸고 어리석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믿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믿어야 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라서다. 의식하든 못하든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기반과 체제, 생활의 순간순간이 이웃과 사회에 대한 호혜와 믿음, 분업과 나눔의 산물이라서다. 믿든 안 믿든 인간은 서로 기대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라서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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