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땅과 바다 이야기
[경향신문]
며칠 전 남북연극교류위원회가 주관하는 ‘동에서 서로 남북을 걷다’라는 행사에 맞추어 나의 영상강연이 있었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남북종단은 불가능하기에 한반도의 허리를 동서로만 횡단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을 다시 보았다. 마치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호랑이가 온종일 철책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2년 전부터 이주해서 살고 있는 포르투갈에서 기차를 이용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직선거리는 1만여㎞지만 주행거리는 약 14만㎞로 2주 정도 걸려 중국과 한반도의 접경 지점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종단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노정을 폭 4㎞의 비무장지대가 막고 있다.
일제 식민지였지만 분단은 없었던 시절,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조선의 청년들이 중국 상하이를 거쳐 기차나 배를 이용해 긴 여정 끝에 독일과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들 중에는 한글학자로서 후에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이극로(1893~1978)와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1899~1950)은 독일에, 승려로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후에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법린(1899~1964)과 상해임시정부의 외무활동을 위해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던 서영해(1902~1949)는 프랑스에 체류했다. 삶의 족적이 이들처럼 알려진 사람들이 있지만 잊힌 사람들도 많다. ‘100년 전 파리로 간 식민지 청년의 돌아오지 못한 여정’(한겨레, 2019년 4월29일)이라는 제하에 소개된 이용제(1896~1986)의 삶이 그런 경우다. 생전에 파리에서 잠깐 뵈었던 이분은 프랑스 국적도, 분단된 조국의 한쪽을 택하기도 거부한 채 무국적자로 삶을 마감했다.
지금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서울로 열린 직항로가 있어 15시간 정도면 갈 수 있고, 직항로가 없어 시간은 더 소요되지만 평양도 그다음 날로 도착할 수 있다. 독일 시인 하이네가 망명 생활 중 파리에서 증기기관차를 보고 ‘기차로 말미암아 공간은 죽었다. 이제 시간만 남았다’라고 감탄한 때가 1843년이었으니 기차는 이래저래 당시 대중화될 수 없는 교통수단이었다. 따라서 조선 청년들은 대부분 상하이에서 출발해서 프랑스 마르세유로 향하는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역사는 ‘땅과 바다’의 투쟁기록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할 것은
한반도에서의 미·중 대리전쟁
미·중 원심력으로 가능성 적더라도
만일을 위해 우리 구심력 키우려면
남북은 우선 함께 성장해야 한다
로마나 몽골 또는 오스만 튀르크처럼 주로 대륙의 정복을 통해 제국을 건설한 경우와 달리 지구 표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바다를 제패해서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엔리크(헨리) 왕자의 주도로 시작된 이른바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은 15~16세기에 걸쳐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 중국, 남미 등 여러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해 최초의 글로벌 제국이 되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마젤란(1481~1521)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후견 아래 스페인의 산루카 드 바라메다 항구를 1519년 9월20일에 떠나 근 3년 만에 귀항했다. 애초 출발한 다섯 척의 배 가운데 한 척만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승선했던 선원 242명 가운데 18명만 겨우 살아 돌아왔으나 주인공 마젤란은 귀항 도중 필리핀에서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었다. 처음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해서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이 역사적 사건은 우리가 사는 곳이 땅과 바다로 이루어진 평면체가 아니라 공처럼 둥글다는, 문자 그대로 지구(地球)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런 지구 개념을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조선에서도 이익, 홍대용, 박지원 등 실학파 학자들이 유럽의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중국을 통해 받아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땅은 주로 철학적인 개념인 지(地)나 곤(坤)으로 이해되었다. 이때로부터 지구라는 개념은 단순히 근대과학적인 인식에만 그치지 않고 당대의 세계 질서에 대한 새로운 발상도 함께 열어주었다. 박지원의 손자로 김옥균, 박영효 등을 위시한 개혁파를 길러낸 박규수(1807~1877)가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어디에 중심이 있는지를 그들에게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지구에는 고정불변한 어떤 중심이 없기에 중국이 아니라 조선도 그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날로 쇠락하는 대륙세력 중국과 새로 발흥하는 해양세력 일본 사이에 놓여 동아시아의 각축장이 된 조선반도는 중심에 서기는커녕,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가 개척하는 것을 포기한 지배층 때문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온 국토 분단의 세월이 이제 머지않아 80년에 이르니 중심의 괴로움이 사실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 한 방향으로 계속 항해하면 결국에는 지구 밖으로 떨어져 나가 죽을 것이라고 믿었던 마젤란의 동시대 사람들처럼 넘어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가 마치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땅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동안 많이 생겼다.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한반도를 가르는 분단의 철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서양에서 남미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할 때 심한 풍랑으로 크게 고생한 마젤란은 그의 시야에 전개된 잔잔하고 넓은 바다를 보고 이를 ‘태평양’(마르 파치피코)이라고 불렀다. 지구 바다 면적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태평양도 기실은 무서운 허리케인이나 태풍을 불러오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의 무대이기도 했다.
동서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제법 오래다. 대서양으로부터 태평양으로 이동하는 세계 경제와 국제정치의 역동성이 한마디로 표현된 것은 자신을 미국의 ‘최초 아시아 대통령’이라고 칭했던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2011)였다. 미국은 여전히 정치, 군사, 경제 등의 여러 분야에서 이곳을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지만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위상의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이 바로 이 변화의 핵이다.
태평양을 자신의 앞마당으로 여겨온 미국은 대륙과 대양을 포함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건설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쿼드’(미국, 일본, 인도, 호주)와 ‘오커스’(미국, 영국, 호주)와 같은 안보장치의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수출에 있어서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최근 미·중 간의 군사적 긴장이 이런 상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독일의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그의 저서 <대지와 바다>에서 역사는 대지를 밟는 자와 바다를 가르며 항해하는 자 사이의 투쟁 기록이며 이 가운데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투쟁이 가장 매혹적이었다고 쓰고 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태평양을 가운데 둔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결과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를 두고 지금 많은 논쟁이 있다.
냉전 종결 이후 일극 체제의 정점에 서 있는 미국과 이에 도전하는 후발 강대국 중국의 관계를 그레이엄 앨리슨이 <예정된 전쟁>에서 분석한 것처럼 전쟁까지도 포함하는 피할 수 없는 갈등으로 발전할 것인지, 아니면 극단적인 상황을 서로 피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을 마련할 수 있을지를 두고 견해들이 갈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은 한반도가 미·중의 대리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대만이 이의 첫 시험대에 오를 수 있지만 한반도에도 비슷한 위험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분단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가능성이나 위험성을 사전에 제거하거나 아니면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남북이 함께 기울여야 한다는 과제는 아주 절박하다. 물론 이를 어렵게 하는 미국과 중국의 강한 원심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해서 한반도의 구심력을 키우기 위해 남북은 우선 함께 성장해야 한다. 개천절인 10월3일은 독일 통일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나였던 우리 땅과 바다를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하는 의문과 더불어 “함께 속했던 것이 이제 함께 성장한다”는, 빌리 브란트가 통일 독일에 붙인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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