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경쟁'의 허상.. 계급사회를 찌르다

김예진 2021. 10. 5.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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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역사 새로 쓴 '오징어게임'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강자가 만든 게임에 뛰어든 약자
압축성장 과정 치열한 경쟁 대변
한국적인 정서로 가득
골목길 놀이·양은도시락 등 부각
情 많은 주인공과 함께 묘한 매력
철저한 시장분석 산물
BTS로 높아진 韓문화 관심 주목
로컬의 글로벌화 전략 흥행몰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제공
“이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 이길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공정경쟁은 이곳의 마지막 보루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평등이다. 룰을 깬 자들은 즉결처분. 시신은 본보기로 전시된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 세계의 규칙을 어기고 나아가 이 세계의 순수한 이념을 더럽힌 자들의 최후입니다. 저희는 이런 사태가 다시 없을 것을 약속드리며 참가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참가자들의 서약에 응답하듯, 이 세계 공권력인 관리자는 살벌한 사과로 룰 수호를 약속한다.

그들이 짜 놓은 룰 안에서 모든 게임을 다 통과한 최후의 승자 성기훈(이정재)에게 남은 것은 그러나 주변 사람들 죽음이다. 그는 이 룰 자체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당신은 그걸(상금) 누릴 권리가 있어”라는 오일남(오영수)의 설득도 들리지 않는다. “당신들 대체 누구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라고 내내 묻던 성기훈은 결국 상금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뒤돌아 걷는다. “우린 (경마장의)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빨갛게 염색한 머리칼을 깃발처럼 날리며, 그가 이제 룰 자체를 바꾸러 떠날 것이 암시된다.
넷플릭스 제공
‘오징어게임’이 흥행 대기록을 세우고 있다. 1997년 설립된 넷플릭스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다.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썼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공개된 지 17일이 지난 4일까지도 ‘오징어게임’은 83개국 중 75개국에서 1위, 한국 등 8개국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인 국가들에서도 1~4일 전까지 1위에 있다가 한 단계 내려온 것에 불과하다. 영화 ‘기생충’ 이어 또 한 번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이 한국식 사회고발극은 영화, 드라마를 불문한 하나의 ‘장르’가 되고 있다.

‘오징어게임’은 ‘계급사회하에서 공정경쟁이란 없다’고 설파하는 직유법의 드라마다. 게임을 주최하는 유산계급,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관리자는 공권력, 게임을 수행하는 참가자들은 무산계급이다. 계급사회를 단순 도식화해 신랄하게 꼬집는 직설이다. 생활고에 쪼들리다 게임에 참가하는 456명은 역전의 희망을 품고 게임에 참여하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갈림길에서 고통받다 죽음을 맞을 뿐이다. 룰을 세팅하는 자들은 1명의 승자를 남겨 희망의 증거로 삼거나, 사회적 약자 ‘깍두기’에 호의를 베풀어 체제를 유지하려 하지만, 이 체제 속에서 행복한 자는 없다. 게임 우승자인 성기훈이 과거보다 더 병든 일상을 살다 오일남을 만났을 때, 오일남은 말한다. “자네 돈이 없는 사람과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다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쟁사회의 문제를 다 안고 있지만 한국은 압축성장 과정에서 훨씬 더 치열했다”고 지적했다. “해외에서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지만 우리만큼 급격하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체감적으로 훨씬 더 많이 느끼고, ‘오징어게임’이 그 지점을 굉장히 직설적으로 다룬다. 그런 면이 외국인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간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제공
‘오징어게임’은 한국적 정서로 가득하다. 해외 시청자들에게 어필한 또 하나의 매력이다. 컬처(culture·문화)로도, 스피릿(spirit·정신)으로도 뭔가 부족한 ‘정서’라는 단어는 영어교육자들이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으는 단어다. 그에 못지않은 단어는 ‘사연’이다. 한국적 정서와 사연이 1화부터 9화까지 가득 담긴다.

해외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 많은 성기훈이라는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성기훈은 어쩌면 배틀로열 장르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부적절한 주인공이다. 불법추심업자와 딱지남(공유)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상우네 생선가게’에 간 성기훈은 어린 시절 동네 동생의 어머니 앞이기에 싱글벙글 웃으며 허세를 부린다. 성기훈은 주식 선물 ‘옵션’이 뭔지는 몰라도, ‘맷값폭행’을 당해 번 돈으로 산 생선 한 토막을 길고양이에게 선물하는 사람이다. 2인1조로 진행되는 게임을 앞두고 참여자 39명이 남았을 때, 그는 “저 노인네가 혼자 남겠네”라는 수군거림에 솟구치는 측은지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결국 오일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말한다. “영감님, 저랑 하실래요?”

정 평론가는 “기생충이 계급사회를 냉소적으로 다뤘다면, 오징어게임은 신파”라며 “데스서바이벌 장르가 외국에서는 장르의 잔인성을 강조하며 자극적으로 소비되는데, 오징어게임은 감정적인 부분을 많이 건드린다. 우리에겐 익숙하나 해외에선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캡처
‘오징어게임’의 히트 뒤에는 넷플릭스 전략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로컬의 글로벌화 전략의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 평론가는 “어떤 나라의 문화를 상품화하는 전략이 대단하다. ‘킹덤’ 역시 보편적 장르에 한국이란 요소를 넣어 새로 상품화해 성공시킨 케이스이고, ‘나르코스’는 남미, ‘종이의 집’은 스페인으로 글로벌 히트를 시켰다는 전례 역시, 오징어게임을 제작하는 계기가 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오징어게임’의 배경에도 동시대 한국인의 심리와 문화 기저에 깔린 경험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정서를 보여주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양은도시락을 앞에 두고 성기훈은 “옛날 생각나네. 가운데 난로만 있으면 딱 데워먹고 좋은데. 상우아 기억나냐. 초등학교 교실에 조개탄 난로 있었잖아. 올려놓으면 누룽지 생기고”라고 설명한다. 다세대주택 골목 모형으로 세팅된 게임장에서는 오일남이 “내가 마누라랑 아들이랑 이 집에서 살았어. 마당에 작은 연못도 있었는데.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들놈이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있었어. 아빠가 온 줄도 모르고” 하고 추억을 상세히 묘사한다.

강 평론가는 “게임 내용을 상세히 알려주거나 한국 골목문화를 설명하는데, 드라마가 내수용이었다면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장면이 많다. 탈북자인 강새벽(정호연)의 등장도 해외시장을 겨냥해 다분히 의식적으로 넣은 캐릭터로 보인다”고 말했다. 탈북과 강제북송 현실은 국내라면 진영논리의 프리즘을 통과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이지만, 맥락이 제거되는 해외에선 글로벌스탠더드다.

강 평론가는 “한쪽에선 ‘국뽕’으로 차오르고, 한쪽에선 장르적 완성도를 문제시하며 양극단의 반응을 보이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오징어게임의 성공은 넷플릭스의 철저한 시장 분석 결과물”이라며 “방탄소년단 이후 한국문화에 대해 국제적 관심이 높아진 것을 돈으로 제일 잘 바꾸고 있는 곳이 넷플릭스”라고 했다.
황동혁 감독
황동혁 감독은 2008년부터 극본 구상 및 집필을 시작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한국사회는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저서)라는 물음이 유행했고, 2013년에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한다’(오찬호 저서)라는 20대를 만났다.

이어 2010년대 후반부터 달아오른 공정담론은 지금 정점에 있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결과가 정의로울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약속을 시험한 5년의 끝자락에 드라마는 배포됐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책과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을 읽다 고시원을 떠난 관리자(이병헌)는 어떤 세계를 그린 걸까. 드라마 2회 23분쯤 등장하는 경찰의 책상에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올려져 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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