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상품 통해 결혼한다면".. 발칙하게 풀어낸 사랑 이야기

김용출 2021. 10. 5. 19:5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국 대거상 수상 윤고은 작가 신작 '도서관 런웨이'
어떤 가능성·미래 보고 가입하는 보험
이야기·소설적으로 매력적이라 생각
재난·재건 다룬 소설이라 개인적 생각
안나 통해 아주 조금씩 이야기가 이동
전작을 읽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어
한줄이라도 독자 일렁이게 하면 근사
올해 영국의 대거상 번역 추리소설상을 거머쥔 윤고은 작가는 신작 장편 ‘도서관 런웨이’에서 결혼과 보험 문제를 엮어서 사랑 문제를 산뜻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그는 결국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걸어갈 때 손잡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재문 기자
요즘 귀찮아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많잖아. 결혼이라는 큰 문제를 보험을 통해 접근한다면, 결혼이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면···. 보험 상품을 통해 결혼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신다운 발상 같아 보였다. 두어 개의 이야기가 만나 꼬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즐기는.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에선, 여행과 재난을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여행과 재난을 대놓고 붙여 새 이야기를 만들었던 그 아니었던가.

오래전, 그는 ‘결혼보험’을 생각했다. 계약서나 각서, 보험 약관집, 책 속의 책 등의 형식에 흥미‘를 갖고 있던 그였다. 왜냐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조항이나 조문으로 이뤄진 보험 약관집 등에는 그 시대의 삶이나 일상 등이 절묘하게 담겨 있으니까.

“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택사항인데, 보험에 들 때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떤 가능성, 미래를 보고 가입하게 되잖아요. 이게 이야기적으로, 소설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요.”
올해 권위 있는 ‘대거상 번역 추리소설상’을 거머쥔 윤고은 작가의 신작 장편 ‘도서관 런웨이’(현대문학)는, 현대의 사랑과 결혼을 보험 상품을 통해 ‘발칙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결혼과 보험을 결합해 펼쳐 보이는 이야기라니.

도서관에서 런웨이하는 모습을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올리는 여행사 직원 출신 안나는 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서 책으로 둔갑한 결혼보험 약관집을 발견한다. 안나는 약관집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거액에 팔린다는 걸 대학 친구 유리에게 알려준 뒤 홀연히 사라진다.

보험사 직원 출신인 친구 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약관집과 함께 안나를 찾아 나선다. 안나의 남편 정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리는 약관집을 찾은 뒤 보험사 언더라이터 조를 만나면서 애상치 못한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데.

그의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영국 추리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윤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의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단어와 문장, 사유마다 재기와 발랄을 덕지덕지 붙인 그의 만연체 말들은 귀에 와서 박힌 뒤 뇌의 전하수체로 신호를 다급하게 보내곤 했다. 웃으라고, 또 웃으라고.
―소설은 도서관 책 사이로 걷는 안나의 모습에서 시작해 다시 안나의 모습으로 끝나는데.

“소설을 시작하게 된 지점은 도서관에서 걸어가는 인물의 이미지, 책들이 작은 사이즈로 꽂혀 있을 때 그 앞을 걸어가는 이미지였다. 안나라는 인물이 등장해 책 사이를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다시 드물게 걷게 된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이번 작품에선 조용해야 하는 도서관과 런웨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붙여 상상했다.”

―안나와 유리, ‘조’와 정우라는 흥미로운 네 인물이 등장한다.

“저는 특정 인물을 모델로 하지 않고, 대체로 만들어간다. 제 모습도 조금씩 들어가고. 유리는 안나와 다르게 차분하게 진실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조’라는 인물은 안나의 생활을 알고 싶어서 자격이 되지 않는 정우의 보험을 가입시켜준, 문제적 인물이다. 정우는 안나가 사랑하는 인물 정도로만 나오고 면모가 잘 나오지 않는다. 조가 심사하는 과정에서 서류상으로밖에 알 수 없고, 뒤늦게 안나의 추억 속에서 드문드문 알게 되는 사람이다.”

―사건 전개의 핵심은 결국 결혼보험 약관집인데, 어떤 의미인지.

“결혼은, 예전에 비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이기에 개인에게 큰일이고 엄청난 모험이다. 이 모험을 약간 덜 힘들도록 편하게 도와주고 하나하나 풀어서 얘기해야 하는 과정을 버튼 하나를 눌러 대신할 수 있다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커버해 주는 보험회사가 등장한 것이다. 보험회사는 약관집에 모든 것을 명문화해 놓는다. 소설 안에는 2가지 형식의 약속이 있다. 하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놓고 다투는 보험 약관집이고, 또 하나는 명문화된 건 아니지만, 안나와 정우 사이에 약속하는 말들이다. 너무 다른 두 약속의 세계를 대비시키고 싶었다. 보험 약관집의 세계는 디테일하게 따져서 돈이 오가는 세계이고, 약속의 말은, 책임을 물을 순 없지만, 안나가 남편과 했던 말들, 이미 사라져버린 사람의 말과 표정을 계속 곱씹고 믿고 싶은 대로 되뇌는 세계이다.”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밤의 여행자들’이 재난을 다룬 소설이라면, ‘도서관 런웨이’는 재난과 재건을 다룬 소설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안나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휩쓸리고 즐겨하던 도서관 런웨이를 멈추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말을 반복해 떠올리면서 남편과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3인칭 이야기에 닿게 되니까. 소설 시작 부분에서는 안나가 걸었다면, 끝부분에선 안나의 이야기가 걷는 셈이다. 안나를 떠나서 아주 조금씩 이야기가 이동하는 것이다. 저는 이것들이 무너진 것을 하나하나 재건하고자 애쓰는 몸짓으로 느껴졌다. 어떤 이야기들은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한 보 앞으로 걸어 나가기도 하니까. 이를 통해 자기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을 때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추슬러 가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의 모습을. 걸어간다는 자체가, 속도건 보폭이건 상관없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 안에는 모두 세 개의 이야기가 함께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우리가 읽고 있는 ‘도서관 런웨이’가, 다른 하나는 스토리텔링 효과로 도서관에 들어가 버린 결혼보험 약관집이, 마지막은 이제 겨우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한, 안나가 친구 유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저는 안나가 친구 유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소 껄끄러웠던 두 사람이 이제 한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계가 된 것만으로도 그 둘 다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아서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고은은 2003년 단편소설 ‘피어싱’으로 대산대학문학상을, 2008년 장편 ‘무중력 증후군’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차례로 수상하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로 ‘무중력 증후군’(2008), ‘밤의 여행자들’(2013), ‘해적판을 타고’(2017)을, 소설집으로 ‘1인용 식탁’(2010), ‘알로하’(2014),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2016),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2019)을 펴냈다. 특히 장편 ‘밤의 여행자들’은 지난해 영어로 번역 출간된 뒤 올해 7월 ‘대거상 번역 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어떤 작가,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조금 욕심을 내자면, ‘전작을 읽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다. 그래서 어느 집 책장에 넓게 한 줄, 혹은 두 줄을 꽉꽉 채우는 작품을 쓰고 싶다. 그렇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제 소설 중에 단 한 권, 혹은 단 한 페이지, 단 한 줄이라도 어느 독자의 마음속을 일렁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 하고. 사랑은 그런 찰나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추리소설로 분류돼 대거상까지 받은 마당에, 앞으로 본격적으로 추리 소설을 쓰는 건 아닐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더니,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매일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EBS 라디오를 켜면 들리는 그 목소리가. “사실 어떤 것이 본격적인 추리소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제 소설 안에서 추리소설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관심이 저로서도 재미있게 다가오고요. 전 제가 쓰고 싶은 방향으로 계속 쓸 뿐이지만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