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칼럼] 日 100대 총리 기시다, 한국에도 귀 열어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자민당 총재가 지난 4일 중·참 양원 본회의에서 열린 총리 지명 선거에서 일본 총리로 선출됐다. 1885년 내각제를 도입해 초대 총리를 맡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후 100대째 내각총리대신이다.
일본의 역대 총리 가운데 '기시다'란 성씨를 가진 총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기시'(岸)는 '기슭'을 뜻하고, '다'(田)는 '논밭'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시다'란 강 기슭에 있는 농경지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확실히 강 기슭에는 논이 많다. 농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고, 물을 얻기 좋은 강변은 농사에 안성맞춤 땅이다.
나아가 '기시'는 지형이 크게 변화하는 경계선의 장소 부근까지도 가리킨다. 산과 평지의 큰 경계, 즉 절벽 땅도 '기시'라고 불렀다. 쌀이 경제의 기본이었던 옛날에는 평지는 물론이고, 절벽으로 이어지는 땅까지 가능한 한 모두 갈아서 농경지로 만들었다. 절벽 바로 아래 땅까지 힘들여 경작한 곳이 '기시다'이고, 이 땅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기시다'씨다.
이런 기시다 집안에서 총리가 배출됐다. 3대 세습 정치인인 기시다 후미오는 자민당 내 명문 파벌 '고치카이'(宏池會, 일명 기시다파)를 이끌면서 좌절도 여러번 맛보았지만 마침내 총리에 올랐다. 그가 정치의 '큰 꿈'을 품게된 것은 어렸을 적 겪었던 인종차별 때문이라고 한다.
기시다는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관료였던 아버지의 미국 부임으로 초등학교 1~3학년을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보냈다. 당시 같은 반 학생들과 동물원에 갔을 때 선생님이 옆에 있는 친구와 손을 잡으라고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백인 소녀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며 기시다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기시다는 "정치를 통해 인종차별같은 부조리를 없애고 싶다"고 마음 먹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최고 명문 도쿄(東京)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아버지를 포함해서 주변에 도쿄대학 졸업생이 많아 자신도 당연히 도쿄대학에 들어갈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3번이나 실패했다. 결국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졸업 후 일본장기신용은행에 입사해 약 5년 동안 근무했다. 공무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岸田文武) 중의원의 비서가 되면서 1987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1992년 부친이 사망하자 그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인 1993년 히로시마(廣島) 제1구에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중의원에 당선됐다. 35세 때였다.
그는 소극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국회의원이었다. 기회만 오면 '셀프 홍보'에 열을 올리는 정치판에선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눈에 띄지 않았고 출세도 상대적으로 느렸다. 지역구 지지자들이 "좀 튀어보라"고 조언하자 "꾸준히 땀 흘리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2007년 1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장관(오키나와·북방·국민생활·과학기술·규제개혁 담당)으로서의 첫 입각도 당선 동기 중에선 빠르지 않은 편이었다.
이후 기시다는 아베 내각에서 4년 7개월이나 장기간 외무상을 지내면서 아베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기시다는 박근혜 정부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아베의 지원에 힘입어 그는 이번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유력한 후보였던 고노 다로(河野太郞)를 누르고 당선됐다.
본인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자신의 강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이고, 성실한 성품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유력자의 목소리만 듣는 것 아니냐"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우유부단이란 평도 따라다닌다.
그렇지만 새 총리, 새 내각이 들어섰으니 한일 관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한일관계가 국교 정상화 이래 최악의 상태여서 그에게 거는 기대감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취지의 축하서한을 보냈다. 새 총리가 전임자의 전철을 답습하지 말고 전향적 발걸음을 내딛기를 기대한다. 그의 조상들이 피땀흘려 농경지를 개간했듯이 새 총리 역시 한일관계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했으면 한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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