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한겨레 2021. 10. 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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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의 우연한 연결]당시 서울역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나 만주철도 등 국제선 기차들의 종착역이었다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대륙행 기차의 시발역이었다는 뜻이다. 서울역 플랫폼 13번 홈에 가서 모스크바 가는 티켓 한장 주시오, 파리행 기차표 한장 주시오, 헬싱키 가는 표 한장 주시오, 하면 그 자리에서 유럽행 열차표를 살 수 있었다니, 오 놀랍고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닌가.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ㅣ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영화 <암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쪽에 노출되지 않은 세명을 비밀 암살 작전에 투입한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 등이다. 이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잠입한다. 그러니까 만주나 연해주 쪽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것이다. 이 말인즉슨 당시 서울역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나 만주철도 등 국제선 기차들의 종착역이었다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대륙행 기차의 시발역이었다는 뜻이다. 서울역 플랫폼 13번 홈에 가서 모스크바 가는 티켓 한장 주시오, 파리행 기차표 한장 주시오, 헬싱키 가는 표 한장 주시오, 하면 그 자리에서 유럽행 열차표를 살 수 있었다니, 오 놀랍고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닌가.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원산을 지나고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연결되었다. 이후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지나 베를린에 닿았다.

실제로 이렇게 열차표를 사서 올림픽이 열린 베를린까지 간 이가 손기정이다. 그가 남긴 글에는 정차역마다 내려서 뜀박질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준 이위종도 이 기차를 타고 헤이그까지 갔다. 안중근 김구 여운형 박차정 김원봉 이회영 주세죽 허정숙 박헌영 나혜석도 이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상하이로 울란바토르로 가고 또 왔다. 이들뿐이었으랴.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장사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이주했다. 기차가 연결된다는 건 마음의 지도가 철로를 따라 이어진다는 뜻이다. 막힘없이 거침없이 대륙을 횡단하여 유럽까지 이어지는 기차는 조선 사람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확장하고 자극하여 미래의 모습을 전에 없던 형태로 꿈꾸고 설계하게 했으리라.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학생들과 ‘서울역을 국제역으로’라는 주제로 1년 동안 여행하고 공부한 적이 있다. 전남 목포역에서 출발하여 서울역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베를린까지 모든 역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세상을 주유했다.

대륙의 곳곳에는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 연해주 지역에는 한인 거주지를 비롯해 최재형 조명희 이동휘 이상설의 무덤과 집, 기념비들이 남아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은 이곳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대학을 세우고 집단거주지를 형성하고 독립자금을 모으고 무장투쟁을 지원하고 군사훈련을 하고 인재를 길러냈다.

전 유럽과 러시아 혹은 소련과 중국에서 일어나는 혁명과 전쟁, 논쟁과 연대에 당시 한반도 사람들은 뜨겁게 참여하고 개입하거나 관여했다. 런던과 상하이와 모스크바와 서울이 ‘동시패션’ 시대를 살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르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하바롭스크에는 김알렉산드라가 근무했던 건물이 있다.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자 여성’이라는 수식이 주는 울림은 사실 없다. 그녀의 생을 촘촘히 들여다보아야 왜 하바롭스크시가 몇번의 재건축과 재개발을 거치면서도 ‘김알렉산드라가 근무했던 곳’이라는 표지판을 끝내 남겨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과 차별을 직시한 가난한 조선 이주노동자의 딸이 우랄과 연해주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조직하고 싸우고 사랑하며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를 놓는 이야기가 ‘아시아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시내 한가운데 있다. ‘김유경 거리’도 있다. 거리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건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오랜 토론과 검토, 합의를 거쳐 하바롭스크 시민들은 조선 사람 김유경을 발음함으로써 기억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돌소나무 전나무가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벌판을 따라 2박3일 기차가 달리면 이르쿠츠크가 나타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도시다. 바다 같은 호수 바이칼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아직 친일 작가가 되지 않은 시절의 이광수가 쓴 <유정>에는 바이칼과 시베리아가 등장한다. 이광수 역시 젊은 시절 블라디보스토크, 치타를 비롯해 여러 러시아의 도시를 떠돌았으니 그 도시들이 작품 배경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백석도 한용운도 어떤 시절에는 북방의 도시를 떠돌았고 그 흔적이 작품 속에 스며 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한인 대표단은 리콜리 거리 17번지에 묵었다. 홍범도 김규식 조봉암 김단야 장건상 등등. 이들은 각지에서 기차를 타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려고 다양한 노선으로 갈아타가며 모스크바로 왔다. 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국제회합에서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뿐만 아니라 전세계 피압박 민족들의 해방을 더불어 도모하며 원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그 시절 조선 사람들은 한반도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계인의 심장을 갖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륙횡단열차는 세상은 드넓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으며, 공조와 연대가 공동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임을 몸으로 알게 해주었던 듯하다.

모든 곳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분단 이전의 한반도는 드넓은 대륙과 오롯이 연결되어 있었다. 연해주부터 시베리아 몽골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유럽까지 단절 없이 흐르고 이어지고 맞물리고 연관되어 있었다.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억압과 불의에 세계의 사람들과 더불어 항거하였다. 한반도만을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고 조선 사람만을 자신의 동지로 인식하지 않았다. 대륙횡단열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의 드넓은 평원과 숲, 초원은 분단과 함께 우리 삶에서 삭제되었다. 분단은 영토뿐 아니라 상상력의 회로마저 절연하는 손상을 입혔다.

유라시아가 다시 기차로 연결된다면 한반도는 육상실크로드의 기착지이자 해상실크로드의 출발지로 그 위상이 달라질 것이다. 사람과 물자와 사상과 미래와 꿈과 이상이 기찻길을 따라 연결되는 상상은 늘 설렌다. 북방에 대한 상상력을 복원할 때 우리 삶의 무대는 확장되고 개인과 국가의 미래비전 또한 광활해질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과 청년의 마음이 조금 더 용맹하고 담대해질 것이다.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덧붙임: 유튜브에서 ‘서울역을 국제역으로’라고 검색하면 춤추고 노래하며 대륙을 횡단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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