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5도2촌, 1년 반
[아침햇발]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논설위원
“아니, 말씨 형제들 왜 이래?”
살면서 말벌과 말매미를 미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을볕에 자줏빛으로 물든 사과대추에 뻗은 손을 흠칫하게 한 것은 말벌이었다. 손가락 마디보다 큰 녀석들이 붕붕거리며 혼을 빼놓는데, 탐스럽게 잘 익은 대추에는 여지없이 흠집을 내놨다. 가슴 한쪽이 파인 기분이었다. 7~8월에는 말매미가 가지를 갉아 수액을 빠는 통에, 주렁주렁 달린 대추까지 고엽제 맞은 양 타 죽었다. 상심이 컸는지 말매미를 씹고 있는 꿈을 꿨다. 농사 참 어렵다는 걸 절감한다.
부모의 유산을 정리해 마련한 충남 공주의 밭에 2018년 봄 사과대추 40여주, 매실 20여주를 심었다. 귀농·귀촌 계획을 세웠다기보다 고향 근처에 연고나마 남겨두자는 생각이었다. 한달에 한두번 예초기로 풀을 깎고 퇴비도 줬다. 농지원부를 작성했고, 농업경영체 등록도 했다. 단위농협에 300만원을 출자하고 조합원이 돼 제법 농부의 꼴을 갖춰갔다. 지난해까지 소득이 없다가 올해 아삭한 사과대추가 제법 열렸다.
밭에 내려오는 빈도가 잦아졌다. 컨테이너 모양으로 6평 농막을 짓고, 지하수를 개발한 지난해 봄부터는 아내와 주말을 거의 시골에서 보냈다. 마침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돼 주말 약속도 사라졌다. 막히는 시간을 피해야 경기도 일산의 집에서 2시간에 닿을 수 있지만, “그 정도는 떨어져야 ‘모드 전환’이 되지” 하고 긍정하면 운전이 즐거웠다. 요즘 말하는 ‘5도2촌’이었다.
시골에는 늘 할 일이 있어 저녁밥 수저를 놓으면 뙤약볕에 그을린 얼굴에 졸음이 쏟아졌다. 파리, 모기가 성가셨고, 이따금 출몰하는 뱀에 소스라쳤다. 그래도 차령산맥 줄기에 안긴 마을은 아늑했고, 해지면 음소거를 한 듯 컴컴한 정적이 좋았다. 주 후반이면 한 귀퉁이에 심은 고추, 상추, 가지가 궁금했고, 마당의 채송화, 백일홍, 마리골드가 삼삼해졌다. 가끔 유서 깊은 공주 시내 나들이를 가고, 인근 유구읍내 장날 구경, 43년이나 호떡을 구웠다는 아주머니 가게 들르기, 로컬푸드매장에서 서리태, 무말랭이차 구입 같은 걸 하면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텃세가 있다던데, 불쑥 들러 고구마, 밤, 솎은 열무를 건네시는 마을 어르신들은 오히려 “언제 집 지어 내려오냐”고 채근했다. 이젠 칠석날 마을 동계에 불려가 후손 없는 산소 벌초도 같이 하고 국밥도 먹는 사이가 됐다.
자주 오니 마을이 좀 보였다. 의외로 외지인의 유입이 많았다. 40호 남짓 되는 마을에 어림잡아 아홉 집이 그랬다. 공무원으로 올해 정년을 맞은 세종시의 김 선생님은 8년 전 산 농가를 개조해 주말이면 농사를 지으러 온다. 그 뒤에 비어 있던 집은 천안에 사는 이가 매입해 개축 중이다. 또 다른 부류는 일찍 타지에 나갔던 마을 출신의 환류이다. 교장으로 정년을 한 분은 부모님 집터에 새집을 지어 들어왔다. 정년을 앞둔 대전의 교감 선생님은 주말 고추 농사를 지으며 오가고 있다. 타지의 형제자매가 돈을 걷어 옛터에 새집을 짓고 콘도처럼 쓰는 사례가 두 집이고, 조만간 한채가 더 늘어난다. 원주민이 거의 다 연로하니, 이렇게 10년만 지나면 마을의 인구 구성이 바뀌겠다. 지난해 이후 농막 수요가 급증하고 도시와 농촌 양쪽에 근거를 두는 ‘듀얼 라이프’가 관심을 끄는 걸 보면 이 마을의 현상만은 아니었다.
‘지방 소멸’이란 말이 나온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귀농·귀촌, 기업 유치 등 ‘정주인구’ 증가에 초점을 맞춘 정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재택·유연근무의 확산은 농산어촌 활성화 정책에 변화의 힌트를 준다. ‘관계인구’에 주목하는 흐름이 그것이다. 관계인구는 지역과 다양한 형태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을 뜻한다. 일회성 관광객과 정주인구의 중간쯤 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 먼저 주목했는데 2018년부터 총무성 주관으로 ‘관계인구 창출 사업’을 마련해 점차 확대해가고 있다. 지난 7월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주중 도쿄 집, 주말엔 시골집”처럼 ‘복수 거점을 두고 생활하기를 희망한다’는 일본인의 비율이 2018년 14%에서 2020년 7월에 27.4%로 두배 가까이 늘었다고 보도했다. 한국에서도 전남북, 경남 등 여러 지자체가 내놓는 ‘한달~세달 살기’ 프로그램이 복수 거점 생활자 유치에 눈을 돌리는 정책이다. 생활양식은 변한다. ‘5도2촌’, ‘4도3촌’에 익숙해지고, 그 지역이 좋아지면 와서 살겠다는 이들도 늘 것이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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