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탄소제로로 가는 길을 여는 사람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산다’는 말이 있다.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은 뒤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고상하게 산다는 뜻이다. 말은 좋지만 모순으로 느껴지는 게, 돈에 강하게 집착하는 성품인 사람이 그렇게 번 돈을 품위 있게 쓸 것 같지 않아서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고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은 애초에 돈을 악착같이 벌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MS) 기술고문인 빌 게이츠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세계 수십억 명이 쓰는 운영시스템(MS윈도우)과 사무 소프트웨어(MS오피스)를 비싸게 팔아 벌어들인 엄청난 돈(주식)을 2000년 비영리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각국이 자국 이기주의에 벗어나지 못해 외면하는 지구촌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여 년 동안 힘써온 게이츠를 보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연초에 노트북을 사면서 20만 원 가까이 하는 MS윈도우 정품을 선선히 같이 구매했다.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꽤 됐지만 게이츠 없는 마이크로소프트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지난 20여 년 동안 지구촌 규모의 좋은 일을 해온 그의 ‘선한 영향력’이 마이크로소프트에도 미친 것 같다. 지난주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기고문을 보고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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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출 줄이는 것만으로는 안 돼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환경책임자인 루카스 조파와 지속가능성과학책임자인 아미 루어스가 주저자인 글의 제목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산화탄소 100만t 제거 구매-탄소제로를 향한 교훈’이다. 지난 1월 마이크로소프트가 대기의 이산화탄소 130만t을 없애는데 비용을 지불했다고 발표한 것과 관련한 세부 내용을 설명하면서 다른 기업들도 모범으로 삼으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글의 어조는 자기 자랑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기에는 현재 온실가스 증가로 인한 기후변화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지금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안 되므로 기업들은 이와 함께 대기에 농축된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이 이런 일을 직접 할 필요는 없고 대신 일정 금액을 할당해 이런 일을 하는 기관이나 기업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절반 이상 줄이고 남은 만큼의 배출량을 대기에서 이산화탄소를 없애 순제로(net zero)에 도달한다는 계획이다. 2050년까지는 1975년 창립 이래 마이크로소프트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만큼을 대기에서 거둬들인다는 시키지도 않은 목표까지 정했다.
이를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먼저 10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해 탄소 배출 감소와 제거 기술에 투자하기로 하고 공모했다. 그 결과 189가지 제안을 받았고 이를 다 합치면 이산화탄소 1억5400만t을 대기에서 없앨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제안만 고려하자 5500만t 정도였고 그나마 고급 제거 방법은 200만t에 불과했다.
이산화탄소 제거 방법에 고급(high-quality)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게 좀 어색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준은 대기에서 뽑아낸 이산화탄소를 적어도 1000년 이상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땅속에 저장하거나 광물화시키는 방법이다. 말 그대로 이산화탄소를 확실히 없애지만 높은 기술력이 있어야 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이산화탄소 1t을 없애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받은 제안들의 평균 비용은 141달러였다.
한편 저장 기간이 수십 년에서 길어야 100년 수준인 저급 방법은 나무를 심는다든지 초지를 조성해 생물체와 토양에 탄소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산불 같은 자연재해 변수가 있지만 대신 쉽게 실천할 수 있고 비용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이산화탄소 1t을 없애는데 평균 비용은 16달러에 불과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제안들(5500만t) 가운데 선정해 구매한 대기 이산화탄소 130만t 제거 계획의 제안들 대부분은 저급 방법을 통해서다. 페루와 니카라구아, 미국 등지에서 숲을 늘리는 프로젝트와 미국의 농토를 살리는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한편 고급 방법으로는 스위스 회사 클라임웍스가 아이슬란드에 짓는 직접공기포집 설비 제작에 돈을 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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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인 저장 기술과의 만남
지난달 완공된 설비 ‘오르카(Orca)’의 이산화탄소 포집량은 1년에 4000t에 불과하지만(그럼에도 직접공기포집 설비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이를 계기로 기술이 발전하고 비용이 낮아진다면 규모를 더 키운 설비가 널리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기금의 일부는 유망한 기술을 살리는데 투자한다는 것이다.
북대서양에 있는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청정지역이라 이런 곳에 왜 포집 설비를 짓는지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배출 직후에만 주변 농도가 더 높을뿐 결국은 확산으로 섞여 농도가 일정해진다. 한국이나 아이슬란드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아이슬란드에서 대기 이산화탄소를 없애 농도를 낮추면 결과적으로 한국 대기도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스위스 회사가 직접공기포집 설비 입지로 굳이 아이슬란드를 정한 건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는 화산지대라 지열발전이 가능해 설비 작동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포획한 이산화탄소를 땅 밑으로 주입해 돌(방해석)로 바꿔 저장할 수 있다. 만일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과정에서 상당량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면 그런 설비를 만들 이유가 없다.
보통 이산화탄소포집 설비는 이산화탄소를 다량 배출하는 발전소나 공장에 붙어있다. 이산화탄소를 효율적으로 포집할 수는 있지만 십중팔구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땅 밑으로 보내 돌로 바꾸는데 적합한 지질 조건이 아니다. 반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설비는 어디든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최적의 부지를 고를 수 있다.
직접공기포집의 원리는 에어컨과 비슷하다. 팬을 돌려 실내의 덥고 습한 공기를 증발기로 끌어들이면 냉매가 증발하며 공기의 열을 빼앗아 온도가 내려가며 수증기가 응결해 물이 된다. 그 결과 차갑고 건조해진 공기를 내보낸다. 직접공기포집는 팬을 돌려 외부 공기(대기)를 이산화탄소를 흡착하는 물질(흡착제나 용매)이 있는 공간으로 끌어들여 이산화탄소를 포집한 뒤 흘려보낸다.
흡착제(또는 용매)가 이산화탄소로 포화되면 따로 모아 열을 가해 이산화탄소를 분리한 뒤 흡착제(또는 용매)는 재활용한다. 문제는 따로 모은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하느냐다. 땅 밑 암반 사이 틈에 주입해 저장할 수 있지만 틈이 생겨 빠져나가면 말짱 헛짓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얻은 이산화탄소를 원료로 다른 물질을 만드는 공정과 결합하기도 하는데 비용은 물론 에너지도 꽤 들어가 취지가 퇴색한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크가 돈을 댄 클라임웍스의 설비는 이 부분이 차별화돼 있다. 분리한 이산화탄소는 물에 녹여 파이프를 통해 지하 400~800m 현무암층으로 주입한다. 이곳에서 물에 녹은 이산화탄소, 즉 탄산이온(CO3²-)은 현무암의 다공성 표면에서 녹아 나온 칼슘 이온(Ca²+)과 반응해 돌(방해석, CaCO³)로 바뀌어 영구히(1000년 이상) 저장된다.
지난 2016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사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입된 이산화탄소의 95% 이상이 2년 이내에 방해석으로 바뀐다. 이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는 기존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라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사이 새어 나갈 위험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논문이 나가고 불과 5년 만에 직접공기포집 기술과 연결돼 상업화 설비로 구현됐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비전을 지닌 기관의 물적 뒷받침이 이런 혁신적인 발견의 실용화를 앞당긴 셈이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자영업자는 물론이고 많은 기업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몇몇 업종은 코로나 ‘덕분에’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다. 이처럼 여유가 생긴 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지구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지원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주위의 찬사를 받지 않을까.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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