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작은기쁨 못느끼는 뇌의 오류..'나아질거란 희망' 잃은 韓의 질병"

나윤석 기자 2021. 10. 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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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선규 기자
일러스트 = 이정호 작가
사진=김선규 기자
‘한국인의 마음’은 문화일보 문화부 유튜브에서 동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휴대전화를 열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해 주세요!

■ 한국인의 마음 - 우리를 이해하는 7개의 질문

① 뇌과학자 정재승이 말하는 ‘우리는 왜 우울한가’

만족감 느끼는 세로토닌 감소

건강한 사람 뇌와 현저히 달라

자살, 충동 아닌 손익계산 결과

AI 프로그램 통해 막을 수 있어

韓, 2030 불안 全연령대 최고

성취 아닌 과정 집중해야 행복

안전망 있어야 삶 즐길수 있어

손 잡아주는 사회 제도가 중요

“우울증은 균형 감각을 빼앗고 ‘거짓 무력감’에 젖게 하지만, ‘진실의 창’이 되기도 한다.”

임상 심리학자 앤드루 솔로몬은 책 ‘한낮의 우울’에서 이렇게 규정하며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 보이지 않는 휠체어에 많은 한국인이 올라타 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높았다. 불안증세를 겪는 비율은 30.0%로 세 번째. 한국인은 왜 이렇게 아프고, 우울한가. 솔로몬은 “우울증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증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과거로부터, 또 미래로부터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이런 질문을 품고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진실의 창’인 우울의 실체를 알기 위해.

정 교수는 전공인 뇌과학을 ‘마음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믿는다. 그가 최근 ‘우울’과 ‘극단적 선택’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것 역시 과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대중 교양서 ‘과학 콘서트’로 이름을 알리고 tvN 예능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통해 ‘국민 과학자’로 사랑받는 정 교수에게 ‘우울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달 23일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이뤄졌으며, 이후 서면 질의·응답을 추가로 진행했다.

―한국인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은.

“최근 2~3년간 한국 사람들이 ‘그전보다 훨씬 더 우울하다’는 걸 느낀다. 우울증은 ‘사회적 질병’이라 사회·경제적 환경에 크게 영향받는다. 한국의 경우 물질적 토대는 이전보다 개선됐으나 ‘개인주의’가 덜 발달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타인과의 ‘비교’가 일상화돼 있다. 비교와 경쟁이 심해 ‘내 삶이 상대적으로 궁핍하고 불행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요즘 식사 자리에 가면 어김없이 ‘참 무기력하고 우울하다’는 말을 듣는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집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우울감이 심화한 것 같다.”

―우울의 양상이 세대별로 다른가.

“한국 사회에서 불안지수가 가장 높은 세대는 20~30대다. 대학을 졸업해도, 높은 영어 점수를 받아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경쟁’이 젊은이들을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 ‘뭘 해야 더 나은 미래가 열리는지 알 수 없는’ 환경이 그들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70~80대는 경제적 궁핍, 부실한 사회 안전망, 사회적 관계 단절 등으로 우울감을 호소한다. 노인 자살률이 세계에서 압도적 1위이다. 성별로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심각하게 우울감을 토로하고, 불안지수도 훨씬 높은 경향이 있다. 지난해 20대 여성 우울증 환자는 20% 이상 늘었다.”

―뇌과학적으로 ‘우울’은 어떤 상태인가.

“우울증 환자의 뇌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뇌와 현저히 다르다. 만족감을 느끼는 데 필요한 세로토닌의 분비와 일상의 작은 기쁨을 느끼는 보상중추(측좌핵·nucleus accumbens)의 활동이 줄어들어 ‘놓칠 뻔한 버스’를 운 좋게 타거나 ‘승진’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전전두엽 기능이 떨어져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왜곡된 판단을 내린다. 우울감이 깊어지면 ‘손실 회피’ 성향이 강해지고, ‘학습된 무기력’을 경험하게 된다. 뇌 기능 저하만으로 우울증을 설명할 순 없지만 뚜렷한 뇌 변화가 발견되는 만큼 임상 뇌과학적 접근이 절실하다.”

―뇌과학자로서 우울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정신질환이 ‘좋은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울과 불안은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게 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내면으로만 ‘침잠’하게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을 거부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우울의 원인을 ‘개인의 나약함’에서 찾는 경향이 있는데.

“우울증에 걸린 쥐를 물속에 빠트리면 허우적거리지도 않고 그냥 죽는다. 이른바 ‘아네도니아’라는 현상으로 우울증이 생명의 본능인 ‘삶을 향한 의지’마저 상실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울한 감정이나 불안은 개인의 잘못이나 노력 부족이 아니라 그들이 놓인 ‘특별한’ 상황 탓이다. 그러니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라고 따져 묻는 건 도움이 안 된다. ‘책망’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려는 노력은 유익하지만, 누구나 우울감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손 내밀 때 잡아줄 수 있는 제도도 중요하다. 삶은 바다 위를 헤엄치는 과정과 같다. ‘안전요원’이 지켜보고, ‘부표’ 같은 이정표와 ‘안전한 그물망’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정 교수는 ‘한국인의 우울’을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자살’이라고 했다. 자신의 연구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도 “자살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뇌과학자에게 ‘생명체의 본능’을 거스르는 비합리적 의사결정으로 여겨진다.

―우울증과 자살의 상관관계가 있나.

“우울증에 걸린다고 반드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자살 시도조차 귀찮고 무서워 몸을 움츠리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컵에 물이 반 정도 있을 때 ‘반밖에 없네’가 아니라 ‘조만간 누가 내 물을 마실 거야’라고 겁을 먹으며 미래를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극단적 선택에 이른다.”

―자살에 이르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어떤 것인가.

“오랜 연구를 통해 자살 과정에 대한 인식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자살이 ‘죽고 싶은 충돌을 억누르지 못해’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자살 시도자를 만나보니 ‘충동 억제 실패’가 결정적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삶을 ‘더 이어가는 노력’과 ‘지금 마감하는 것’ 사이에서 손익계산을 한다. 죽음을 ‘심사숙고’하며 타인에게 ‘구조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자신의 ‘심각한 상황’을 울부짖기도 하는 것이다. 미래 전망이 점점 비관적으로 바뀔 때 손익계산의 결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뇌과학자로서 자살 방지를 위해 수행하는 연구는.

“모든 우울증 환자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 예방 프로그램을 충실히 만들면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는 신호다. 1393 자살예방 상담 전화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민을 듣고 조언을 건넨다. 이 과정에서 나온 ‘대화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하면 그들의 생각을 어떻게 읽고 대화해야 자살하려는 마음을 추스르고 삶의 의지를 되찾아줄 수 있는지에 관한 ‘프로토콜’을 만들 수 있다. ‘머신 러닝(인간의 학습 능력과 같은 기능을 컴퓨터에서 구현하는 기술)’을 활용해 SNS 글에서 자살 시도를 예측하는 연구도 진행할 예정이다.”

30대 초반에 카이스트 교수가 된 그는 ‘실패 없는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100만 권 넘는 책을 판 ‘스타 작가’이자 네이처 같은 해외 유수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학자다. 그도 ‘울적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을까. 뜻밖에 그는 “날마다 우울을 경험하고, 불안에 시달린다”고 했다.

―‘정재승’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 뭔가.

“‘성취’는 ‘세상이 원하는 재능’을 적절한 ‘타이밍’에 발현하고,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재능과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언제든 무력감에 빠지고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 또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우울감이 심해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운동, 요리, 화초 가꾸기 같은 새로운 취미도 가져봤는데 올해는 좀 지친다. ‘내년이면 해결될까’라는 막막함도 느껴지고. 내년 말쯤 되면 사람들이 세상에 나올 텐데, ‘코로나19 시기에 넌 뭘 했니?’라고 서로 물어볼 것 같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알면,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할 것 같다. 무척 힘들었던, 또 ‘힘들어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우리를 응원하고 싶다.”

―우울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지만, 인간은 부조리한 사회를 견뎌내기 위해 ‘과정을 통해 행복해지는 뇌’를 발명했다. ‘성취’와 ‘결과’가 주는 행복감에는 이내 적응이 되지만, ‘과정’이 주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길고 묵직하다.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닌 힘든 삶을 이겨내는 ‘동력’에 가깝다. 행복의 발견과 발명을 통해 우울을 극복해야 한다. 행복은 우울의 반대말이 아니다.”

■ 정재승의 리스트

“우울할 땐 이 책 읽으세요”

“깊은 우울감과 절망감을 딛고 삶을 초월하는 통찰에 이르는 과정들이 담겨 있습니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우울할 때 읽으면 좋은 책’을 묻는 질문에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은 그 자리에’를 꼽았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세상을 떠난 신경학자 색스의 마지막 에세이집. 어린 시절 ‘첫사랑’에 대한 회고부터 병실에서 만난 환자들의 임상 사례에 관한 기록까지 33편의 글을 묶었다. 정 교수는 “존경하는 신경학자인 색스는 ‘뇌의 경이로움’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해온 작가”라며 “신경질환이 심각한 장애가 아니라 뇌의 ‘이상 작동’을 잠시 목도하는 경험이라는 점을 일깨운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색스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써내려간 글들을 통해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이 삶을 대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며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색스는 평생 정신질환자를 치료한 의사였지만, 건강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2019년 국내 출간 당시 추천사를 통해 “색스는 나의 영웅”이라며 “다양한 신경질환을 수술하듯 메스로 섬세하게 헤집고 날카롭게 분석하지만, 결국 ‘도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태어났단 말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져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우울감을 잊게 하는 또 다른 책으로는 일본 만화 ‘천재 유 교수의 생활’을 권했다. 정 교수는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면 다락방에 올라가 뒹굴며 만화책을 보곤 한다”며 “다락방엔 학창 시절 읽었던 만화들이 가득한데 당시 위로가 됐던 책을 보며 ‘고래 뱃속 같은 안락함’을 만끽한다”고 했다. 야마시타 가즈미의 ‘천재 유 교수의 생활’은 시계처럼 규칙적인 삶을 사는 학자가 주인공이다. 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걸어서 출근하는 그는 부랑자·유치원생·바람둥이 등 다양한 존재를 만나며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정 교수는 “원칙을 중시하고, 일상이 온통 ‘학문의 세계’ 안에 침잠해 있는 유 교수를 통해 정반대로 살고 있는 나의 부족한 부분을 되돌아보고, 생각을 다잡는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만나 맛있는 걸 먹으며 ‘사회적 에너지’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삶을 성찰하고 행복을 재생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정재승’에게 ‘만화’가 있듯 누구나 ‘우울의 안식처’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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