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동편제 고장'처럼.. 새벽까지 노랫가락 떠도는 더블린

기자 2021. 10. 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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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푸른새벽, 34×23㎝, 혼합재료.
김병종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 김병종의 시화기행 - (90) 아일랜드와 아일리시 음악

핍박·착취의 역사 지닌 아일랜드

마치 하소연하는 듯한 가락 많아

전란에 휩싸일땐 노래가 칼·방패

음악단·관중 하나된 길거리 음악

연주·박수 뒤섞여 거리 날아다녀

음계·악기는 스코틀랜드와 흡사

쿠바처럼 현대음악의 한 줄기 돼

나는 남쪽의 소읍, 판소리 동편제의 태자리라고 하는 곳에서 자랐다. 문밖을 나서면 늘 어디선가 소리 가락이 들려오곤 했다. 해가 설핏하거나 새벽녘이면 가물가물 흐느끼듯 들려오는 그 세성(細聲)에는 말간 슬픔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땅이 너르고 흙이 기름져 먹고살 걱정이 덜해서였을까, 문밖을 나서면 도처에 ‘소리’였다. 그중에는 ‘동편제왕’으로 불리던 명창 강도근 같은 이도 있었다. 그이의 휘휘 감겨오는 애원(哀願)의 소리는 돌연 꺾이며 뇌성벽력처럼 내리꽂히곤 했는데, 가끔은 들길로 자전거를 달려 명주 머플러 휘날리며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인근에 초청공연 같은 것을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후에 미술가의 길에 들어서면서 어릴 적 남녘에서 구슬프고 가냘프고 혹은 거칠고 강하게 들려오던 그 소리 가락들이 오롯이 먹선을 타고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리가 선이라면 추임새며 북소리는 점이고 여백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런 면에서 무릇 예(藝)는 한통속이며 한줄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더블린에 와서 한밤중이나 새벽녘이면 아득히 먼 곳에서 어렸을 적 들었던 그 노랫가락 같은 것이 들려오곤 했다. 희뿌연 건물들은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 둥둥 떠다니는 조각배들 같은데 소리는 그 위로 날아다니는 것이다. 가까웠다가 멀어지기를 거듭하며 밤새 이어지던 그 소리는 그러나 아침 햇살과 함께 사라진다. 혹, 환청이었을까. 아침에 식당으로 가면서 호텔 측에 물어보니 아마 템플바(Temple Bar)나 그래프턴 거리(Grafton Street) 쪽에서 들려왔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기는 밤새 노래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설명해 줬다. 문화와 역사의 다른 층위에도 불구하고 지난밤 내 귀에 남도 창과 아일리시 음악이 서로 교차되는 듯 느껴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아일랜드, 유난히 많은 수난의 역사를 지닌 나라라고들 말한다. 그 한 많고 곡절 많은 역사를 문자만으로 풀어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 나라의 음악 역시 쿠바처럼 현대음악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을 만큼 그 흐름이 도도하다.

이런 경우의 음악은 대체로 ‘나를 좀 바라봐요, 내 말 좀 들어봐요’라는 듯한 가락 있는 하소연인 경우가 많다. 물론 오랜 아버지와 아버지의 땅, 아들과 그 아들의 아들들이 이어가야 할 땅에 진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올 때면 노래는 칼과 방패가 된다. ‘나가자, 나가서 싸우자’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 아일리시 음악의 폭이 넓고 긴 것은 역사의 물줄기가 그렇게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일리시 전통음악은 음계와 악기가 스코틀랜드의 그것과 비슷하다. 스코틀랜드 역시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것이어서 두 음악은 어떤 면에서 일란성 쌍생아 같은 느낌도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이 다시 아들에게 들려주는 일종의 아일리시 창(唱)인 레블송(Rebel Song)만 하더라도 800년의 기나긴 핍박과 착취의 역사 속에서 태동된 음악이다. 그런가 하면 펍의 나라 아일랜드는 이른바 ‘드링킹 송’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항아리 속의 위스키(Whiskey in the Jan)

맥주, 맥주, 맥주(Beer, Beer, Beer)

펀치 한 잔 (A Jug of Punch)

일요일의 위스키(Whiskey on Sunday)….

그런데 거리를 지나면서 번갈아 보이는 ‘펍(Pub)’과 ‘바(Bar)’가 내게는 헷갈린다. 떠나올 때쯤에서야 두 장소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펍’이 술과 음악이 있는 일종의 공동체적 사교장 같은 곳이라면 ‘바’는 그냥 오가다 들러 한잔하는 곳이었다. 독특한 것은 펍이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을 뛰어넘는 대화와 소통의 장인 것이다. 머리가 하얀 노인들부터 청년층까지 제각기 삶의 골목을 나와 이 작은 광장에 모여 하루 치의 피로를 풀 뿐 아니라 때로는 민족, 역사, 미래 같은 거대 담론도 펼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음악의 물줄기는 역사와 만나고 문학과 만나고 삶의 온갖 서사와 만나면서 합해지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는 셈이다.

오후에야 음악의 거리라는 그래프턴으로 걸어가 본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걸어서 20분 남짓의 거리인데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길거리 공연인 버스킹이었다. 둘러선 사람들과 즉흥 음악단은 서로 연주하고 박수 치며 한 무리를 이룬다. 사면이 막힌 무겁고 엄숙한 공연장이 아닌 기타와 타악기가 섞인 길거리 음악은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어젯밤 내내 들려왔던 그 멀고 희미한 소리의 진원지가 이곳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저 소리는 낡은 골목들과 나무들과 혹은 운하를 건너 내 방에까지 왔으리라. 그리고 그 소리를 통해 민족과 나라와 안과 밖이 만나고 심지어 이방인인 나와도 만나는 것이다. 아일랜드 여행의 소소한 기쁨이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 아일랜드 음악계보

1000년 전통의 ‘하프’… ‘드링킹 송’등 다양한 장르

아일랜드의 음악 역사는 길고 그 형식 또한 매우 다채롭다.

아일랜드 전통 악기로 기네스 맥주의 로고가 되기도 한 하프는 10세기경부터 연주됐으며 귀족악기의 명성을 누렸다.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인 롱룸(Long Room)에는 이 고대 악기가 보존돼 있다.

종류도 다양하며 주로 심야에 부르는 민족 음악계열의 레블송(Rebel Song)이 있고 술 마시며 부르는 드링킹 송(Drinking Song)이 있으며 아일랜드의 자연경관과 사랑을 주제로 한 러브송(Love Song), 그리고 이야기와 서사체의 발라드(Ballad)풍 음악 등이 있다. 아일랜드 음악은 그 예술성과 독자성으로 현대 음악의 한 계보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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