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8) 가온찍기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2021. 10. 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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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늙은이(老子)’ 5월을 세운다. 5월의 샘물 맛은 ‘가온찍기’에 있다.

다석 말씀으로 뜻을 꿴다. 그는 곧이곧고 신성하고 영특하고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참올(眞理)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라 했다.

없긋(無極)과 큰긋(太極)이 하나로 없큰긋(無太極)의 ‘긋’이 참나(眞我)다. 그 참나의 참꼴이 없긋 큰긋의 ‘없’과 ‘큰’이다. 없이 큰 참, 없이 큰 참꼴, 없이 큰 참나! 가온찍기의 ‘간’으로 돌아가는 참 얼나(靈我)다.

‘긋’의 가로 그은 막대기(ㅡ)는 땅이요, 막대기 밑의 시옷(ㅅ)은 사람이며, 막대기 위의 기역(ㄱ)은 하늘에서 온 얼이다. 그 얼이 땅에 딱 부딪혀 솟은 것이 사람이다. 없이 큰 ‘얼’이 사람 몸을 쓰고 나타난 꼴! 그러니 솟 · 나 · 얼!

사람의 참나는 오롯이 얼나다! 영원한 생명의 긋이 제긋으로 돌아야 참나다. 제긋을 제 맘대로 돌리면 제나(自我)다. 제긋은 제 것이 아니다. 영원한 얼줄의 한 토막이요, 영원한 얼줄의 한 끄트머리다. 끝과 머리는 늘 하나다! 끄트머리!

영원한 생명의 한 끄트머리가 한 점 ‘환빛(永光)’이다. 밝돌로 돌아가는 ‘얼빛’이다. 제긋은 영원 이전부터 이어이어 여기에 이어 내린 한 끝이다. 나 홀로 솟은 한 끄트머리다(唯我獨尊). 그 끄트머리가 오늘이다. 오! 늘이다.

가온찍기는 마음에 영원한 생명의 긋이 도는 것이다. ‘간’을 잘 보라. 기역은 니은을 그리고, 니은은 기역을 높인다. 그 가운데 한 점을 찍는다. 가온찍기란 영원히 가고 가고 영원히 오고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것이다. 참올(眞理)을 단박에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에 영원을 콕 심는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가온찍기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끝끝내 표현해 보고 또 표현해 보고, 나타내 보고 나타내 보여야 한다. 내가 내 속을 그려보고 내가 참나를 만나보는 것이 끝끝내이다. 내가 내 바탈(本性)을 보는 것이 끝끝내(見性)! 끝 · 끝 · 내!

깨달아, 스스로 깨달아 솟은 사슴뿔(生角)을 나타내 펼쳐 보이는 실천이 따른다. 그 실천이 디긋 디긋이다. 디긋은 딱딱한 땅을 딛고 사는 긋을 말한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꼿꼿이 땅 딛고 반듯하게 서야 산다. 곧이곧게 님 그리는 정신이다. 이 긋은 영원한 첫긋 그리워 알려하며, 영원한 막긋 그리워 알려한다. 이 ‘첫긋 막긋’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첫긋도 막긋이 아니다. 이 긋의 가온찍기로 오늘 이 자리에서 돌돌 돌아 긋수(점수)를 따낼 뿐이다. 이제 오늘을 무시하고, 여기 예를 무시하고, 이 긋인 ‘나’를 무시하고 맨 첫끝과 맨 막끝만 알려 덤벼들면 잘못이다. 첫끝과 막끝도 이 ‘긋’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 속에 들어가 참나를 본 자만이 형이상도 알고 형이하도 안다. 맨 첨과 맨 끝을 찾는 것은 이 ‘속(中)’ 때문이다. 참나 때문이다. 마음이 맨 첨과 맨 끝을 찾는 것이다.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는 제나에게는 참 얼나가 첨이요 끝이다. 얼나가 시공간의 맨 첨과 맨 끝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음 속 얼나가 여기에 얼굴을 쪽 내민 가온찍기라고 할까?

맘과 ᄆᆞᆷ은 가려 써야 한다. 맘은 아직 ‘하고잡’이 붙어 있다. ᄆᆞᆷ은 하고잡을 버리고 스스로를 세워 도는 것이다. ㅁ과 ㅁ사이의 ㆍ는 바로 세운 가온 돌돌이다. 바탈 ᄆᆞᆷ이 돌돌 돌아야 산숨이 붙는다. 하고잡에 매인 맴과 하고잡을 모은 몸은 그만 끊고 텅 텅 비워야 ᄆᆞᆷ이다. 가온찍기는 ᄆᆞᆷ에 있다! 그 ᄆᆞᆷ으로 새긴 5월을 본다.

오늘 자리는 저잣거리 한 쪽의 큰 마당이다. 장이 섰다. 상점들은 마당에서 사방팔방 시방으로 거미줄처럼, 아니 큰 바큇살로 뻗어나갔다. 우주 한 긋에 둥지를 튼 이 저잣거리로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다. 중원에서, 서방, 동방, 남방에서 초원의 카라코룸을 찾아오듯이. 이미 어떤 상점들은 환하게 등을 밝히고 손님을 받는다. 어디서는 흥정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장이 한창이어도 신성한 큰 마당은 비어 있을 것이다. 소슬한 그 마당에 하늘땅을 잇는 박달나무 하나가 우람하게 솟았다. 거룩하게 우거진 박달! 마당은 신단(神檀)이어서 여기저기 이곳저곳으로 이어이어 가고 오는 한가운데의 가온 ᄆᆞᆷ이다. 여섯은 저잣거리를 둘러본 뒤 박달을 오른다. 밑동의 둥치에서 큰 가지들이 뻗어가는 자리에 둘레둘레 앉는다. 장터의 등이 켜지면서 오색찬란한 등불의 향연이 펼쳐진다. 우주가 온통 환하다.

떠돌이 : (장터에서 가져 온 짓다만 꼴개를 삼고 있다. 짚신을 삼듯이.)

오색찬란한 등불의 향연이 펼쳐진다. 우주가 온통 환하다. 닝겔, 축제, 2020, 수채, 오브제, 모빌

어린님 : (여섯 중 끝으로 박달나무 밑동에서 둥치를 타고 큰 가지에 오른다. 떠돌이의 꼴개를 보면서) 하늘땅 어질어? 안 어질어? 다시리는 이도 어질어? 안 어질어? “어질지 않은가”라고 썼으니 어진지 안 어진지 모르겠어.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몰라. 어질되 안 어질어! 글꼴이 참 이상해. 답이 먼저고 이유가 그 뒤야. 꼴개 삼으니 어질다, 꼴개 삼으니 어질지 않다, 이리 해야지. 어질어, 꼴개 삼아서. 어질지 않아, 꼴개 삼아서. 참 알 수가 없군! 도대체 꼴개가 뭐야?

사슴뿔 : 허허 참, 이것 참! 꼴개는 짚으로 만든 개라네. 오래 오래 전 삶이 퍽퍽할 때 사람들은 제삿상에 꼴개를 올렸다네. 지어 올릴 때는 정성이요, 제사 끝나 버릴 때는 무심(無心)이니, 있는 듯 없는 듯이라네.

‘어질지 않다’와 ‘꼴개 삼다’의 관계를 풀지 않으면 그 뒤가 꼬여 삼천포로 가버린다네. 어짊의 주인이 ‘하늘땅’, ‘다시리는이’라는 걸 눈감고 곰곰이 기울여 보세. 무엇이 보이나? 어렴풋이 보이는 그 꼴을 보아야 한다네. (바큇살로 뻗어나간 길들을 가리키며) 길은 가는 것이어서 못갈 곳이 없다네.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풀고 옹글게 덜함도 더함도 없는 것이 길이라네. 두루 다녀도 막히지 않고 하늘땅에 앞서 있으며 잘몬의 범벅(chaos)에도 있다네. 그러니 꼴개에도 있지 않겠는가. 허허 참, 이것 참!

사랑이 : (바람이 박달나무로 들어 와 수천수만 개의 가지를 뒤흔든다. 잎들이 너울을 타며 속삭인다.) 하늘땅은 저절로야.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지. 어렴풋한 그 꼴의 실체는 올바로 돌아가는 우주 행로의 돌돌이지 않은가.

3월에서 다석은 “씻어난이의 다시림은, 그 ᄆᆞᆷ이 븨이고, 그 배가 든든 ᄒᆞ고. 그 뜻은 므르고, 그 뼈는 셰오라.”라고 했어. 그 말을 말숨으로 받아서 깨달이가 “그이 ‘있없이’ 있는 그 저절로 ‘다시림’. ‘다시림’은 다시 임한 그이. 어디에나 임해 있는 그이, 그 다스림. 하나는 여기저기 있고, 그 여기저기가 다 하나니 다시림은 하나, 하나님!”이라고 풀었지. 여기서도 다석은 “다시리는이”라고 썼어. 그러니 그이는 ‘다시림’이야. 하늘땅과 다시림은 서로 다르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저절로일 뿐!

늙은이 : (사랑이의 말을 바로 받아서) 문제는 ‘어짊’에 있어. 어짊은 하늘땅의 속이 아냐. 다시림의 속도 아니지. 그 속은 사람 속이야. 어짊이 들고나는 것은 사람 마음이거든. 어진 사람이 있고 어질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 어진 하늘땅, 어진 다시림 따윈 없어.

사람이 이루는 아름다운 힘이 어짊이야. 하늘땅은 일 없이 이루는 그대로고. 사람의 일이 어짊이고, 하늘땅의 일은 그대로란 거야. 하늘땅은 어짊이 없으니 어질지 않아. 다시리는 이도 어짊이 없으니 어질지 않지.

하늘땅은 비었어. 다시림의 자리도 비었지. 산숨, 늘숨으로 텅텅 비어서 돌돌돌 돌아갈 뿐이야. (잎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산숨과 늘숨이 가 닿는 곳이 우주 배꼽 아랫자리야. 다시림의 ‘님’이 머무는 그곳. 맑아. 온 ᄆᆞᆷ이 하나로 비어서 맑으니 뜻이 없어. 뜻이라는 말도 없어. 무어 바랄게 없으니 그저 시원할 뿐이지.

‘꼴개 삼다’의 말은, 뜻 없이 바랄 것도 없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텅 빈 마음(無心)이란 거야. 짚으로 개를 짓는 것은 그저 자연으로 어떤 꼴을 지었을 뿐이란 얘기지. 그 꼴은 있으나 없으나 그런 거야.

깨달이 : (바람이 그의 몸을 휘어감아 올린다. 아주 고요하고 맑고 향기로운 바람이다.) 어짊 따지면 기울어. 어짊 따지면 쪼개져. 너그럽고 착하고 슬기롭고 속알 높은 것이 어짊. 한쪽으로만 기울어.

너그럽지 않고 착하지 않고 슬기롭지 않고 속알 높지 않으면 어찌 돼? 쪼개져. 하늘땅은 기울지 않. 치우치지 않. 하늘땅은 번갈고 되돌며 한 꼴 차림의 가온찍기. 잘몬은 저절로 돌아. 저절로 도니 더할 나위 없는 ᄆᆞᆷ. 텅 빈 ᄆᆞᆷ. 잘몬은 더할 나위 없는 꼴개. 텅 빈 ᄆᆞᆷ으로 꼴개 보듯 잘몬 뵈. 쓰고 버리는 따위 꼴개 아니. 다스리는 이 어짊을 따르지 않. 씨알은 저절로 돌아. 더할 나위 없는 ᄆᆞᆷ. 텅 빈 ᄆᆞᆷ.더할 나위 없는 꼴개. 꼴개 보듯 씨알 뵈. 쓰고 버리는 따위 꼴개 아니.

비어 돌고 돌아 솟나는 움의 산알 트기!

말은 그만 뚝 끊고 가온찍기!

비어 돌고 돌아 솟나는 움의 산알 트기. 닝겔, 숲의 비밀, 2020, 연필, 수채, 콜라쥬

떠돌이 : (다 삼은 꼴개를 들어 올리며) 하늘땅은 늘 잘몬으로 꼴개를 짓고 삼았어. 세상 온갖 꼴개는 다 그렇게 태어나 자라고 병들고 죽는 거야. 돌돌 돌아가는 올바로야. 나서 죽지 않는 게 있나? 그런 건 없어! 다스리는 이도 마찬가지야. 씨알로 꼴개 삼지 무엇으로 꼴개 삼아? 그리 꼴개 삼으니 어질다고 해야지. 어질고 안 어질고가 어딨어? 어질지 않으면 꼴사나운 거야. 하늘땅도 어질지 않으면 꼴사나워. 다스리는 이가 어질지 않으면 그 꼴이 우스워. 씨알들은 다 하늘땅 보고 살아. 다스리는 님 보고 산다고. 씨알 마음에 어짊이 있어 도는데 하늘땅이 그걸 무시하면 안 돼. 다스리는 님도 그럼 못써.

씨알은 다 꼴개야. 나무도, 새도, 산도, 강도, 물고기도 다 꼴개야. 세상에 꼴개 아닌 건 없어. 그런데 씨알 마음에 하늘 모시니 하늘이 환하게 열렸어. 환빛으로 터져서 짱짱하게 비어서 맑고 시원해. 몸이 ᄆᆞᆷ이 되어서 얼나로 깨어 솟아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얼나가 깨어 돌아도 씨알은 이 땅에서 씨알의 삶을 살아. 하늘땅이 다 들어차서 ᄆᆞᆷ이 저절로 그대로 돌고 돌아도 씨알의 몸은 꼴개로 사는 삶이지.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진 삶이야. 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어진 삶은 꼴갑 떨지 않는 거야. 제 꼴을 내려놓는 거야. 제나가 없는 거야. 제나의 삶이 아닌 거야. 어진 삶은 얼나가 깨어 솟은 속알로 가득 가득이니 그 가득의 속알을 나누는 거라고. 서로서로 알알이 알맞이 하도록 돕는 거야. 그래야 서로서로 일어서. 서로서로 열리는 거라고. 얼나를 열어 알알이 열매 맺고 무르익어 씨알 알맞이로 달달한 생명이 되는 것이지. 하늘 모신 내가 곧 하늘이니 그 하늘이 무럭무럭 땅 딛고 자라고 열리고 또 열리는 끝끝내의 삶이 어짊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나타내 보이고 또 나타내 보이는 참나의 삶이 어짊인 거야, 참!

꼴개는 한낱 껍데기야. 그 껍데기를 벗어야 참나가 솟지. 벗기 전까지 씨알은 다만 꼴개에 지나지 않아. 알알이 알맞이로 하늘 모신 자리에 참나의 참꼴이 환빛이지. 꼴개 벗고 참꼴의 얼나 솟도록 씨알은 어진 삶으로 살아야 돼!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사슴뿔 : (박달나무에서 내려와 큰 마당에 선다. 바람이 뒤따른다. 하늘땅 위아래가 높고 크다. 바람을 일으켜 그 사이에 선다.) 하늘은 늘 스스로 저절로 돌아가니 텅 텅 비어 맑다네. 땅은 하늘의 스스로를 받아 돌아가니 늘 저절로라네. 스스로 저절로 있는 그대로 돌아가는 이 텅 텅 빈 하늘땅은 없이 큰 긋(無太極)이라네. 허허 참, 이것 참!

빈 것으로 가득 가득이니 쓰고 또 써도 다 채우지 못하겠네. ‘없’에서 ‘있’이 나고 또 나고 나도 ‘없’은 줄어들지 않는다네. ‘없’은 끝이 없는 없이요, 바닥없는 바닥이며, 바깥 없는 여기라. ‘있’이 결국 ‘없’으로 돌아가니 ‘있’은 어디에 있고 ‘없’은 또 어디에 있나. ‘있없’는 하나로 솟아 돌고 도는 으뜸 하나라! 그 하나는 ‘있없’에 앞서 있으니 또한 비었다네. 허허 참, 이것 참! 그러니 하늘땅 사이는 텅 비어 빔으로 가득 가득한 풀무 속 같구나.

다석은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에 빗대어 하늘땅 사이를 보았다네. 손으로 당기고 밀고, 발로 밟고 밟아서 풀무질을 해도 그 속은 늘 비어서 가득 가득이니 바람이 솟는다네. 쓰고 쓰고 또 쓰고 써도 풀무 속을 다 비울 수 없다네. 허허 참, 이것 참!

어린님 : (바람이 돌아가는 그 사이 하늘땅의 동그라니 눈에 선다. 시원하게 뚫린 하늘땅의 투명한 눈.) 오호라! 그러니 이렇게 비었어도 하늘땅은 쭈그러들지 않아. 온 몸에 가득 가득 느껴지는 이 짱짱한 비움. 이 비움이 돌고 돌아 바람을 일으켜. 생명의 바람을 솟게 해. 이 바람이 꼴개를 짓는 김/숨(氣)이야.

사슴뿔 : (마당을 거닐며) 다석이 말했다네. 사람 사이는 누리요, 몬(物) 사이는 한늘이라. 누리는 사람 사이요, 빈탕은 잘몬(萬物) 사이라. 빈탕에 든 잘몬이니 몬 사이는 빈탕이라. 몬에 빈탕 삶을 트고 살면 죽음이 없다. 허허 참, 이것 참!

속알머리 없기로 그토록 없을 손가. 빈탕 들어 늘 사는 걸 모르고, 몬끝에 나가 저 죽는다고 아우성이네. 한늘엔 죽음이 없네. 빈탕은 크고 큰 늘이니 한늘이지 않겠는가! 씨알이 그걸 깨달아야 한다네. 허허 참, 이것 참!

늙은이 : (바람의 한 줄기를 받아서 큰 그림을 하나 그린다. 번짐과 스밈과 사라짐으로 짓는 그림이다.) 사람 사이는 결코 한늘로 바로 서지 못해. 어짊에 기대기 때문이야. 잘몬의 사이가 한늘인 것은 어짊이 없기 때문이지. 어짊이 없어야 저절로야. 스스로 돌아가는 저절로의 올바로가 빈탕이야. 빈탕에 들어야 늘 살 수 있어. 늘삶에 든 것이 한늘이지. 한늘은 비어서 일으켜. 비어야 짱짱하지. 얼이 세. 돌돌 돌아가니 움질움질 나와. 저절로 나와. 스스로 나와. 빈탕이 낳은 얼이야. 알이야. 튼튼해. 그뿐이야. 튼튼한 환빛이 솟으면 속알 밝은 얼나야!

빟님을 보오

저녁마다 지는 해의 끼친 말은 별을 보라.

밤만 되면 별과 별의 눈짓하듯 보인 뜻은

알맞이 돌아 가올 손 빟여 빟여 빟님을 보오.

- 박영호 선생이 풀어 쓴 다석의 ‘빟을 봏’(1961.4.14.)

밤만 되면 별과 별의 눈짓하듯 보인 뜻은, 알맞이 돌아 가올 손 빟여 빟여 빟님을 보오. 닝겔, 꽃,길을 걷다, 2017, 수채,_

사랑이 : (저잣거리의 뻥 뚫린 길을 가리키며) 빈탕은 이토록 크지만 씨알은 이 큰길을 따르지 않아. 저잣거리를 오갈 뿐이지. 큰길을 내버리고 사니 어짊이 보이고 옳음이 보여. 이것저것을 구분하고 나누고 쪼개는 분별심이야. 알맞이로 앎이 서면 으스대기 일쑤야. 으스대는 슬기가 움질움질 나오는 건 다 거짓이야. 어질고 옳고 슬기로운 것도 씨알의 삶이니 언젠가는 다 막히고 막혀서 멈춰 버리지.

높이 오르는 속알은 속알에 기대는 게 아냐. 속알에 기대지 않는 그것이 바로 스스로 저절로의 속알이거든. 그래야 속알이 찼다고 해. 얕 내리는 속알은 속알을 꽉 잡고 놓지 않아. 속알머리 없는 짓이야. 하고잡이 차서 속알이 어지럽지. 속알은 빈 바람과 같아서 차고 차도 보이지 않아. 속알 찬 사람은 결코 짓눌리지 않고 쭈그러들지도 않아. 늘 가득 가득이니까. 속알이 빈 것은 하고잡이 차서야. 속알이 들어 갈 틈이 없어. 밴댕이 속알머리지. 속이 얕아서 금방 쭈그러들어.

떠돌이 : (뚜벅뚜벅 걸어 내려와 박날나무 밑동에 선다.) 씨알 얕잡아 내리는 꼴 도저히 못 보겠군. 씨알과 빈탕 나누는 것도 분별심이야. 씨알이 하늘 모심으로 이 땅에 곧이 서서 사는 삶이 큰길이야. 그 큰길 나누고 어디 다른 큰길 말하는 것은 엉뚱하고 멀뚱하지. 씨알이 어질고 옳고 슬기로워야 올바로 서. 어질지 않고 옳지 않고 슬기롭지 않은 것들과 싸우는 힘이 굳세고 튼튼한 하늘 모심의 빈탕이야. 빈탕의 몸이라고. 몸맘얼이 하나로 빈탕으로 줏대 바로 세우고 돌고 도는 여기 이 자리가 씨알의 길이야. 그 길이 큰길이든 좁은 길이든 상관없어. 길은 이미 훤히 뚫려서 비었는데 무슨 상관이야.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어. 말로 말을 이어서 하늘땅 씨알을 따로 보다간 결국 말이 끊기고 막혀. 아무리 많은 말로 하늘땅을 쌓고 쌓아도 다 쌓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사슴뿔, 깨달이, 사랑이, 늙은이의 꼴이 삽시간에 연기처럼 사라진다. 바람에서 실려서 저잣거리로 흩어진다. 말들이 죽은 자리에 소슬하게 솟은 마당에 박달나무가 환하다. 흰 빛 무리가 나무에 쏟아지면서 돌고 있다.

씨알이 하늘 모심으로 이 땅에 곧이 서서 사는 삶이 큰길이야. 닝겔, 위대한 혼자, 2017, 연필

어린님 : (흰 빛에 휩싸여 오른다. 떠돌이도 올라 박달나무 맨 꼭대기에 선다.) 여기에 세운 말, 돌린 말, 심은 말은 모두 씨심을 심은 씨말. 씨말을 열어야 익어 맺힐 수 있어. 씨말에 사로잡히면 설익어 먹지 못해. 씨알이 경계할 것은 씨말. 씨말의 씨심을 보지 못하면 끊기고 막혀. 씨말의 한 복판을 탁 찍는 것이 가온찍기. 씨심의 한 복판을 보는 것이 얼깸. 얼 · 깨 · 나 · 솟 · 웋 · 님!

김종길은

다석철학 연구자다. 1995년 봄, 박영호 선생의 신문 연재 글에서 다석 류영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날 그 자리에서 ‘몸맘얼’의 참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민중신학과 우리 옛 사상, 근대 민족 종교사상, 인도철학, 서구철학을 좇았다.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뜨거운 한 솥 잡곡밥이다.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정양모, 김흡영, 박재순, 이정재, 심중식, 이기상, 김원호 님의 글과 말로 ‘정신줄’ 잡았고, 지금은 다석 스승이 쓰신 <다석일지>의 ‘늙은이’로 사상의 얼개를 그리는 중이다.

닝겔은

그림책 작가다. 본명은 김종민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 <소 찾는 아이>, <섬집 아기>, <워낭소리>, <출동 119! 우리가 간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등을 작업했다. 시의 문장처럼 사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다.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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