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6>] 겸손한 자가 성공한다..좋은 시작이 있으면 좋은 마침도 있어야
이백(李白)의 악부시(樂府詩) ‘행로난(行路難·험난한 인생길)’ 3수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그 옛날 연의 왕실에서는 곽외를 존중하여, 빗자루 안고 허리 굽히면서도 싫은 기색 없었으니. 극신과 악의가 은혜에 감격하여, 온몸 다 바쳐 뛰어난 재주 펼쳤도다. 소왕의 백골이 덩굴에 감긴 뒤에는, 그 뉘 다시 황금대를 쓸어주려나(君不見昔時燕家重郭隗, 擁彗折節無嫌猜. 劇辛樂毅感恩分, 輸肝剖膽效英才. 昭王白骨縈蔓草, 誰人更掃黃金臺).”
전국시대 후기 지금의 베이징(北京)과 허베이성(河北省)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연(燕)은 남쪽으로 인접한 제(齊)의 침공을 받아 왕이 피살되고 나라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인질로 가 있던 왕자가 귀국하여 겨우 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그가 소왕(昭王)이다. 그는 쑥밭이 된 나라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현자 곽외에게 자문했다. 곽외는 자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까지 정성껏 예우하면 천하의 인재들이 제 발로 몰려들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에 곽외를 스승으로 모신 소왕은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 거기에 황금을 펼쳐 놓고 천하의 인재를 불러들였다. 악의와 극신 등 수많은 인재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왔다. 인재들이 올 때마다 소왕은 황금대 앞에 나가 비를 들고 길을 쓸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들을 예로써 대하면서 자신을 낮추는(禮賢下士)’ 왕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감격하여 연나라의 부흥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 결과 폐허가 된 지 20여 년 만에 나라는 크게 강성해지고, 마침내 악의를 대장군으로 하여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의 70여 개 성 중에서 2개만 남겨놓고 모두 함락됐다.
소왕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국치를 설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겸손’이다. 비록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에서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낮은 자세는 남들을 감동시켜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이처럼 유능한 인재를 초치하기 위하여 정치 지도자가 자신을 낮추는 예는 고금을 통틀어 수없이 많다. 제갈량(諸葛亮)을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가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고사다.
‘사기(史記)’의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가 도성의 늙은 성문지기 후영(侯嬴)이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직접 방문, 자기 수레에 태워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하찮은 신분의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는 나라의 최고 실력자에 대해 후영은 오히려 오만한 태도로 여러 차례 무례를 범한다. 신릉군은 이에 개의치 않고 시종 공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후영을 손가락질하고 신릉군의 사람됨에 찬사를 보냈다. 나중에 후영이 신릉군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 정도면 제가 공자로부터 대접받은 값은 충분히 했습니다. 다들 저를 욕하는 반면 공자를 칭송하지 않습니까” 그 뒤 후영은 주해(朱亥)라는 백정을 추천, 신릉군이 동맹국인 조(趙)를 침공한 진(秦)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게 한다.
신릉군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짐짓 겸손한 자세를 취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등과 함께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 중 한 사람으로서 일세를 풍미, 많은 이의 신망을 얻으며 10여 년간 충실히 나라의 기둥 역할을 했다.
‘사기’에는 또 ‘안자춘추(晏子春秋)’에서 인용한 이런 일화가 보인다.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외출할 때 그 수레를 모는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안영은 겸손한 자세로 다소곳이 수레에 앉아 있는 데 비해 남편은 너무나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를 묻자 아내가 대답했다. “오늘 당신의 꼴을 보니 부끄러워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키가 6척도 안 되는 안자는 재상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데, 당신은 키가 8척이나 되면서 남의 마부 노릇 하는 것이 뭐가 자랑스럽다고 그렇게 기고만장합니까.” 이에 크게 뉘우친 마부는 하루아침에 겸손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뒤에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안영은 마부를 조정의 관리로 추천했다. 마부는 교만에서 겸손으로 변모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안영에 대해 사마천(司馬遷)은 “만약 지금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말채찍이라도 흔쾌히 잡겠다”고 할 정도로 경도(傾倒)했다.
공자(孔子)는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고 말했다. 주(周)의 문물제도를 정비한 주공은 그가 가장 흠모한 역사 인물이다. 그런 대상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정도로 그는 겸손을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귀중한 덕목으로 여겼다.
‘논어’에는 겸손을 직접 언급한 부분은 보이지 않으나 유가에서 강조하는 ‘인(仁)’과 ‘예(禮)’가 바로 겸손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어느 지역에 머물 때마다 현지의 정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공자를 두고 자공(子貢)이 “선생님은 온화, 양순, 공경, 검소, 양보의 미덕으로 그러한 정보를 얻는다(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고 말한 대목이 보인다. 이 다섯 가지 역시 겸손을 말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남을 대하면 굳이 애써서 얻으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좋은 정보를 남보다 먼저 얻는 자가 그러지 못한 자보다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촛불로 정권이 교체된 것이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선 정국이다. 지금까지 익히 보아왔듯이 대다수의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는 자못 겸손한 자세를 보인다. 그런 사람이 일단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서히 오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권 초기에는 후보 시절의 겸손한 모습이 다소나마 남아 있어서 국민을 위한 여러 가지 건설적인 일을 도모하는 척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가면 ‘일자리 현황판’이나 ‘집무실 광화문 이전’도 다 식언(食言)이 되고 만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임기 말에 지지율이 떨어지면 다시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 앞으로의 정치판에서는 제발 이처럼 앞뒤 다른 위선의 행적이 보이지 않기를 갈망한다.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이 있는 것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는 ‘시경’의 말처럼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역경(易經)’에는 “겸손함이란 공경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그 자리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謙也者, 致恭以存其位者也)”라는 경구가 있다. 정치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지도적 인사들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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