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규의 백스테이지] 18세기 빈, 음악의 '운명'을 바꾼 피아노 연주 대결

최은규 클래식 음악 평론가 2021. 10.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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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이브 황제 궁정서 모차르트 VS 클레멘티.. "영적이며 우아한 연주"
당대 최고 겔리네크와 대결 이긴 무명의 베토벤, 이후 전폭적 후원 받아
한국 음악가 세계적 콩쿠르 우승 잇따르는 지금, 걸맞은 기획·지원해야

올해 들어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인 음악가들이 우승했다는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우승한 데 이어 피아니스트 박연민과 첼리스트 한재민이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고, 프라하의 봄 콩쿠르에서는 피아니스트 이동하와 아레테 콰르텟이 우승했다. 얼마 전에는 세계 권위의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1위, 김도현이 2위에 올랐다.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국제 콩쿠르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궁금해진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음악 경연대회가 있었을까? 쇼팽 국제 콩쿠르를 비롯한 주요 콩쿠르들은 20세기에 생겼으므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콩쿠르는 없었다. 하지만 음악가들이 대결을 벌이는 일은 종종 있었다. 특히 18세기 빈에서는 명피아니스트들의 연주 대결을 보는 일이 매우 흥미로운 오락거리였다. 그중에서도 1781년 12월에 이루어진 모차르트와 클레멘티의 연주 대결은 유명하다.

일러스트=백형선

이탈리아 음악가 클레멘티의 이름은 오늘날 피아노 소나티네 몇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클레멘티는 당대에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1781년에 유럽을 돌며 연주 여행을 하던 클레멘티는 그해 12월에 빈에 도착한 직후 모차르트와의 피아노 연주 대결을 제안받았다. 마침내 12월 24일, 황제의 궁전에서 모차르트와 클레멘티의 세기의 음악 경연이 펼쳐졌다. 클레멘티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B플랫 장조 작품24의 2번을 연주했다. 기교적이고 경쾌한 이 소나타는 모차르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후에 모차르트는 클레멘티가 연주한 이 소나타의 주제를 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와 경연을 벌인 지 몇 주 뒤에 클레멘티의 연주가 “기계적”이라고 평했다. 아마도 이 경연이 무승부로 끝난 것이 천재 모차르트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모양이다. 모차르트가 현란한 즉흥 연주를 선보였음에도 모차르트와 클레멘티의 연주 대결은 무승부로 판정이 났는데, 이는 독일 음악보다 이탈리아 음악을 더 좋아했던 마리아 루이자 대공비의 입김이 작용했던 탓도 있었다. 아무튼 모차르트와의 대결에서 패배를 면한 클레멘티는 음악의 도시 빈에서 인정받게 되었음에 안도했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는 “그처럼 영적이고 우아한 연주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극찬했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의 연주 대결 이후 약 10여 년 정도 지났을 때, 빈의 귀족 살롱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진진한 피아노 경연이 펼쳐졌다. 빈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베토벤이 당시 매우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인 겔리네크와 피아노 연주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다. 겔리네크는 베토벤과 겨루기 전날까지도 자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베토벤의 거침없는 피아노 즉흥 연주에 완전히 압도된 겔리네크는 “모차르트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즉흥 연주였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당시 무명의 음악가 베토벤이 유명 피아니스트 겔리네크와의 첫 시합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빈 사람들의 화젯거리였다. 이제 빈의 귀족들은 가볍고 경쾌한 연주로 대중적 인기를 추구하던 겔리네크 대신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베토벤의 연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는 빈 귀족들의 음악 취향이 좀 더 진지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후 빈의 상류층 귀족들은 베토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리히노프스키 후작은 베토벤이 자신의 저택에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했을 뿐 아니라 베토벤이 첫 번째 작품을 출판할 당시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선불을 베토벤 모르게 지불했고 주변 귀족들에게 베토벤의 악보를 사도록 종용했다. 로프코비츠 공작은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공개 초연에 앞서 베토벤이 자신의 저택에서 이 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리 연주해볼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베토벤이 피아노 대결에서 우승한 이후 귀족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리 베토벤이라도 단 시간 내에 명성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의 음악가들에게도 콩쿠르 우승 이후의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 콩쿠르 우승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인 우승자들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잘 이끌고 지원해줄 기획자와 후원자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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