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의 진화]직관은 왜 우리를 배신하는가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1. 10.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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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기 선로 위를 달리는 전차가 있다. 그런데 테러범이 인질 다섯 명을 꽁꽁 묶어 선로 위에 눕혀 놓았다. 전차가 직진을 계속하면 그들은 모두 치여 죽고 만다. 이 긴박한 상황에 당신 앞에 버튼이 놓여 있다. 이것을 누르면 선로가 변경되어 그 인질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변경된 선로 위에 묶여 있는 또 다른 인질 한 명은 희생된다. 어떻게 하겠는가?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 상황에서 만일 당신이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다섯 명은 그냥 희생된다. 반면 버튼을 누르면 한 명은 희생되지만 다섯 명은 살릴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누르는 게 답이다. 그러나 왠지 찜찜하다. 희생당한 그 한 사람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라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다.

똑같은 전차인데 이번에는 선로 변경 같은 것은 없다. 그냥 계속 가다 보면 선로 위에 묶여 있는 다섯 명의 인질이 치여 죽고 만다. 그런데 선로 위에 육교가 있고 거기에 덩치 큰 남성이 서 있다. 이제 게임이 시작된다(‘오징어 게임’보다는 덜 잔인하다). 당신은 그 남성을 밀어 선로 위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망하지만 육중한 그의 몸이 전차를 멈춰 서게 하고 인질 다섯 명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더 곤란해지는 느낌인가?

공리주의적으로 두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동등하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다섯 명을 살리는 게임. 하지만 두 번째 딜레마가 훨씬 더 고민스러운 상황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5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첫 번째 딜레마의 경우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응답이 89%였던 반면, 두 번째의 경우는 11%만이 허용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왜 두 번째 딜레마가 더 큰 부담일까?

사람이 직접적으로 개입되었느냐가 관건이다. 두 번째 딜레마에서는 개인을 직접적으로 손으로 밀어 떨어뜨려야만 했다. 반면 첫 번째 딜레마에서 직접적 도구는 사람이 아니라 버튼이었다. 즉, 이 딜레마는 버튼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축소된다. 우리의 직관은 타자에게 직접적 영향을 준다고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행동들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끔 진화했다. 뇌 영상 연구 결과도 이 주장을 지지한다. 두 번째 딜레마의 경우에는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 반면, 첫 번째 딜레마에서는 인지적 추론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 즉, 도덕 판단에서 직관은 추론보다 힘이 더 세다. 그렇다면 직관에 의존해 도덕 판단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직관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이다. 무인 드론을 띄워 놓고 전자오락하듯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의사결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여전히 수렵채집기에 적응되어 있어 피가 튀고 고통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현장에 있을 때 비로소 흥분한다. 직관과 감정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환경에 한참 뒤처져 있다. 바로 이런 지체 현상 때문에 직관은 규범의 기초가 될 자격이 없다. 즉, 어떤 행위에 대해 ‘불편하지 않으니 도덕적으로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조국 사태’에 대해서는 강하게 분노했던 사람들이 ‘50억 퇴직금 사건’에 대해서는 너무 잠잠한 거 아니냐고 의아해들 한다. 많은 이들에게 조국 사태는 내 자식 입시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불공정 시비처럼 느껴졌다. 반면, 50억원 퇴직금 사건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분배 문제처럼 느껴진다. 곰곰이 따져보면 훨씬 더 말이 안 되는 불공정일 수 있지만, 나 자신이나 가족을 대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그저 부정부패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만일 나와 내 가족이 마땅히 받아야 할 퇴직금에 관한 얘기라면 분노의 강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앞으로 밝혀질 ‘대장동 사태’의 진실은 우리의 직관을 이끌어내기에는 너무 복잡한 사안일 수 있다.

요점은 타자가 잘못된 행동을 했는지(법과 도덕)와 그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이느냐(직관)는 별개라는 점이다. 중차대한 자리에 역술인을 부르고, (가령)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는 분들에게 여전히 공감한다면 여권을 한번 확인해 보시라. ‘직관의 나라’라고 적혀 있지는 않은지. 이성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노예나 다름없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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