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 나폴레옹 경고에도 대출사업 강행.. 국제적 금융가 급부상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1. 10.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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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20]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상> 국제 자본가의 탄생

근대 이후 세계 역사를 이끌어온 힘은 왕 등 정치 세력이 아닌 상인과 금융 세력으로부터 나왔다. 실제로 세계사의 전환점이라 일컫는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발흥, 영국의 산업혁명과 전파, 신대륙의 눈부신 성장 등은 상인과 금융업자의 역사로, 특히 유대인에 의해 주도된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지역 대부업 수준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금융산업으로 바꿔놓았다. 이들은 정보를 토대로 세계를 하나의 금융권으로 묶었고, 신속한 정보를 활용해 돈을 벌었다. 이렇게 축적한 천문학적인 자본과 저금리로 산업혁명을 세계로 전파했으며, 세계 각국에 금본위제를 확장시켰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끈 금융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금융경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회에 걸쳐 알아본다.

하층민 유대인 상인이 독일 헤센 공국의 궁정 재정책임자에 오르는 순간 -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성장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고화폐 거래와 대부업으로 시작해 유럽의 전쟁통에 왕실과 귀족들의 신임을 얻어 환전 사업으로 가문의 기틀을 놓았다. 헤센-카셀 공국의 군주 빌헬름이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 궁정 재정을 맡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독일 유대인 화가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의 19세기 작품, 영국 버킹엄셔 애스코트 이스테이트 컬렉션, 내셔널 트러스트 소장. /위키피디아

고물상으로 시작한 첫 사업

유대인 이야기의 사실상 클라이맥스는 로스차일드가(家)에서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스페인계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주도해 왔다면, 로스차일드가 이후로는 독일계 아슈케나지가 유대인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게토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본격적으로 국제 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집단 거주지 게토에는 150명 정도 살 수 있는 면적에 3000명 넘는 유대인들이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살고 있었다. 마이어는 어려서부터 명석해 열 살 때 랍비양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부모가 모두 천연두에 걸려 일찍 죽는 바람에 열두 살 때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3년간의 랍비 교육은 그를 세계적 금융업자로 우뚝 서게 만든 지혜의 원천이었다. 마이어의 친구들은 대부분 랍비였다. 당시 랍비는 항상 주변 공동체 랍비들과 종교적인 의문점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일이 생활화된 정보의 집합처였다. 정보는 곧 힘이자 돈과 직결되었다.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하노버의 오펜하이머 은행에서 일하면서 동생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부쳤다. 그는 금융업을 통해 5년간 세상을 배운 후 고향에 돌아와 게토에서 고물상을 시작했다. 당시 가게 앞에는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드)가 걸려 있었는데, 이것의 영어식 발음이 로스차일드였다. 유대인은 원래 성(性)이 없었다. 마이어는 이를 자기의 성으로 삼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택 - 로스차일드 가문의 출발점이 된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덴가세(유대인의 골목)’ 주택의 1890년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18세기에 우편 판매 마케팅 도입

그 무렵 각국 화폐 수집을 취미로 하는 귀족이 많았는데 그들은 고(古)화폐에도 관심이 많았다. 마이어는 은행원 시절 쌓은 지식으로 부랑아들이 쓰레기더미를 파헤쳐 들고 오는 동전 중에서 희귀한 고화폐를 분별해 낼 수 있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희귀 화폐를 팔러 다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궁리 끝에, 옛날 동전 목록과 카탈로그를 정성껏 만들고 그 위에 향수를 뿌려 흥미를 보일 것 같은 부호들에게 속달우편으로 보냈다. 귀족들은 향기 나는 카탈로그를 받아보자 신기해했다. 그러자 상품을 갖고 방문해달라는 회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우편주문으로 고화폐를 판매한 사실이다. 그 옛날에 이미 ‘다이렉트 메일’(DM)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마이어는 헷센-카셀 공국의 군주 아들인 빌헬름과 직접 고화폐 거래를 트게 되었다. 당시 헤센 영주는 용병부대를 외국에 보내 많은 돈을 벌어 대부업을 하고 있었다. 이후 마이어는 1769년 빌헬름으로부터 ‘궁정 어용상인’으로 지정받았으며, 자기 가게에서 세금을 걷는 대행업 허가도 얻어 큰 성공을 거뒀다. 마이어는 궁정상인이 된 이듬해에 16세의 신부 ‘구텔레’를 아내로 맞아 19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9명은 전염병으로 일찍 죽어, 슬하에 5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딸들은 사업에서 배제되고 아들 5명이 아버지 사업에 동참했다. 마이어는 아들들에게 다섯 개 화살의 예를 들며 어떠한 경우에도 단결할 것을 가르쳤다. 화살 하나하나는 부러트리기 쉽지만 다섯 개를 한꺼번에 부러트리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후 다섯 개의 화살 묶음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명품 거래부터 채권·환전까지 맡아

이때 마이어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1776년 빌헬름이 용병 파견 대가로 받은 영국은행 어음을 맨체스터 섬유업체에 결제해야 할 금액과 연계시켰다. 이로써 빌헬름과 로스차일드는 서로 환전수수료를 아낄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이어의 국제 어음결제가 시작됐다. 미국 독립전쟁 때 어음할인 규모가 커지며 큰 수익을 거뒀다.

빌헬름이 1785년 ‘빌헬름 9세’로 헤센공국 군주가 되자 그는 막대한 유산과 용병 장사 수입 대부분을 채권 거래에 투자했다. 로스차일드는 커피, 담배, 영국 직물 등 귀족들이 좋아하는 명품 거래로 부를 축적해 나갔으며, 1789년에는 비교적 큰 금액 채권의 할인 업무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들 역시 빌헬름과 은행들을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유럽 전역이 전쟁에 휩싸였다. 마이어는 전쟁 통에 오히려 사업을 더 확대할 수 있었다. 헤센-카셀 공국의 재정 관리인이 된 마이어는 영국이 용병에게 지급하는 급여와 비용도 관리하면서 환전 사업을 국제적으로 키웠다. 당시 유럽 왕실과 귀족들 절반이 빌헬름의 고객이었다. 누군가에게 대출해준다는 것은 금화나 은화를 마차로 채무자에게 운반해주어야 하고, 매월 대출 이자 역시 받아와야 했다. 당시에도 환어음이 있었으나 은행 간 교환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아니라 환전 수수료도 보통 10% 내외로 비쌌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빌헬름의 일들을 도맡아 자기 일처럼 처리했다. 이후 마이어의 사업은 번창해 멀리 암스테르담, 파리, 런던 등 외국까지 거래가 확대되었다.

“다섯 아들이 힘 합쳐라” 5개 화살의 가문 문장 -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로스차일드’라는 성(姓)의 유래가 된 ‘붉은 방패’, 아버지가 다섯 아들에게 힘을 합쳐 살아가라고 가르치며 만든 다섯 개의 화살 묶음 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마침내 자신의 성을 딴 은행 설립

그 무렵 마이어는 빌헬름의 대출 업무를 처리하면서 차제에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정복 후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전 독일에 오스트리아와의 거래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빌헬름은 몰래 오스트리아와 돈 거래를 시도했다. 대형 은행들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빌헬름의 제의를 거절했다. 로스차일드 은행이 그 일을 떠맡아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금융가로 부상했다. 다섯 아이들은 유럽 전역에 산재한 빌헬름의 채권 심부름을 위해 뛰어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전쟁 판도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중요한 도시마다 자신의 일을 봐줄 하수인을 심어두어 정보 수집과 업무 편의를 도모했다.

마이어의 사업 변화에 프랑스 혁명만이 아니라 영국의 산업혁명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빌헬름의 주요 고객이 영국이라 마이어는 채권 회수 관계로 영국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그는 싼값에 대량 생산되는 영국 면직물에 주목했다. 당시 영국산 직물이 유럽 대륙에서 가장 이윤이 많이 남았다. 그는 무역업도 직접 하기로 마음먹었다. 1798년 3남 네이선에게 제법 큰돈을 주어 맨체스터로 보냈다. 영국 직물의 직수입을 시도한 것이다. (계속)

유대인은 왜 돈을 잘 벌었나

대부분 문맹이었던 시절, 성경 읽으려 의무적 글 공부... 무역·금융업서 유리해져

유대인들은 서기 66년과 132년 두 번이나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진 뒤, 민족 전체가 가나안에서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를 이산(離散), 곧 디아스포라라 부른다. 이후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공동체를 의미했다. 로마제국과 싸우면서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멸하는 통에 사제 계급을 포함한 다른 종파들은 모두 소멸되고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사제가 없는 평신도 종교가 되었다. 로마제국은 가나안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명 자체를 아예 가나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다.

그 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들에는 종교적 의문점이 생겼을 때 공동체 랍비들 간에 편지로 의견을 나누는 전통이 생겼다. 이후 편지에는 상품 정보와 환시세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정보 등이 포함되었고, 랍비들은 이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장이 서는 곳에서 다른 지역 상품과 환시세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뿐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이용해 무역과 환전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가 오가던 길이 상품 교역의 통상로가 되었다. 이렇게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정보가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는 대부분이 문맹인 시절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사제 없는 종교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모두 의무적으로 글을 배웠다. 이것이 무역과 금융업에서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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